오늘날 글로벌 브랜드의 컨셉과 언어는 더 이상 국경 안에 머물지 않습니다.
브랜드는 새롭고 독특한 이미지를 통해 소비자에게 다가가기 위해, 때로는 타인의 언어와 문화를 빌려 쓰기도 합니다.
이러한 전략을 문화 차용 브랜딩(Cultural Borrowing Branding)이라고 합니다.
즉, 특정 문화의 언어·이미지·미학을 전략적으로 차용해 브랜드의 정체성을 구축하는 방식입니다.
이는 단순한 외형적 모방이 아니라, 타 문화의 상징 체계를 통해 새로운 감각적 언어를 창조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전략을 채택할 때는 섬세한 주의가 필요합니다.
존경과 영감의 표현이 될 수도 있지만, 무지와 도용의 논란으로 이어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1. 타인의 문화로 정체성을 표현하는 브랜드들
1-1. Häagen-Dazs : 언어의 위장을 통해 창조한 북유럽 감성
미국에서 탄생한 아이스크림 브랜드 Häagen-Dazs는 사실 덴마크와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브랜드명 역시 덴마크어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조어(造語)입니다.
창립자 루벤 매투스(Reuben Mattus)는 유럽산 프리미엄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이러한 가짜 단어를 고안했다고 합니다.
그는 “북유럽 감성이 고급스러워 보였기 때문”이라 밝혔고, 이 인위적 언어는 미국은 물론 글로벌 시장에서도 성공적으로 작동했습니다.
1-2. Superdry : 일본의 시각 언어를 입은 영국 브랜드
영국 패션 브랜드 Superdry는 일본어 표기 “極度乾燥(しなさい)”를 로고 전면에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브랜드의 뿌리는 일본이 아니라, 런던의 거리문화입니다.
창립자들은 도쿄 여행 중 본 간판의 조합과 일본식 그래픽 감성에 매료되어, 이를 브랜드 언어로 차용했다고 합니다.
일본 맥주 Asahi Super Dry와 연계된 것이 아니냐는 추측도 있으나, 공식적으로 확인된 바는 없습니다.
Superdry는 ‘일본이 만든 듯한 영국 브랜드’라는 독특한 정체성을 구축하며 세계적 성공을 거뒀지만, 최근 매출 하락 이후 리브랜딩을 단행하며 스트리트 감성을 벗고, 영국적 장인정신과 진정성을 강조한 프레피 룩으로 전환했습니다.
1-3. Wagamama : 단어 그 자체가 브랜드 철학이 되다
영국의 레스토랑 체인 Wagamama는 일본어 ‘わがまま(제멋대로)’를 그대로 브랜드명으로 삼았습니다. 이 단어는 일본어에서 부정적인 의미에 가깝지만, 영어권 소비자에게는 mama라는 친숙한 음절과 '아' 모음의 반복이 만들어내는 리듬 덕분에 발음하기 쉽고 경쾌하게 들립니다.
결과적으로 자유롭고 캐주얼한 퓨전 아시안 푸드 콘셉트와 절묘하게 맞물리며, 서구 소비자에게 "쿨하고 개성적인 동양 감성"으로 인식되었습니다.
1-4. Bacha Coffee : 타인의 유산으로 럭셔리를 창조하다
싱가포르의 Bacha Coffee는 모로코 마라케시의 1910년대 카페 Dar el Bacha의 미학과 스토리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했습니다.
건축적 장식, 색채, 서사를 정교하게 차용해 "오리엔탈 헤리티지 럭셔리"라는 새로운 카테고리를 만들어냈습니다.
이는 단순한 테마화가 아닌, 타 문화를 세련되게 재번역(translation)한 사례로 평가받습니다.
*brandB의 글 <TWG&Bacha Coffee>도 함께 읽어보세요.
1-5. Yepoda : 한국어를 차용한 서구의 K-Beauty 브랜드
독일에서 탄생한 화장품 브랜드 예쁘다(Yepoda)는 이름 그대로 한국어 '예쁘다'를 그대로 차용했습니다.
한국의 스킨케어 루틴과 감성에 영감을 받은 이 브랜드는, 외국인에게 다소 낯선 발음임에도 과감히 네임으로 채택했죠.
이는 한국어가 하나의 문화 코드로 작동한 드문 사례이며, K-뷰티 트렌드의 확산과 함께 유사한 시도가 점차 늘고 있습니다.
*brandB의 글 <해외에서 탄생한 K-뷰티 브랜드>도 함께 읽어보세요.
2. 문화 차용 브랜딩의 장점
문화 차용은 단순한 모방이 아니라, 문화적 상징을 새로운 맥락으로 전환할 때 비로소 가치가 발휘됩니다.
그 이유와 효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 새롭고 차별화된 이미지 : 기존 시장의 익숙한 언어를 넘어, 새로운 감각과 이미지를 제시합니다.
- 낯섦이 만드는 호기심 자극 : 이국적이면서도 매력적인 낯섦이 감정적 호기심을 자극합니다.
- 확장된 스토리텔링 : 브랜드가 단일 문화의 산물이 아닌, 복합적 세계관의 산물로 인식될 수 있습니다.
- 기존 문화 자산의 전이 : 특정 문화가 가진 상징성과 이미지를 차용함으로써, 해당 문화에 친밀감을 가진 소비자에게 자연스럽게 수용됩니다.
결국 문화 차용은 글로벌 시대의 브랜드 언어 실험이며, 소비자의 인식 속에 새로운 세계관을 제시하는 감성의 번역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문화 차용 브랜딩의 주의사항 - 차용이 아닌 도용이 될 때
그러나 모든 차용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문화적 맥락을 존중하지 않은 채 상징만을 상업적으로 이용할 경우, 그것은 곧 문화 도용(Cultural Appropriation)으로 비난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 의미 왜곡: 언어나 상징을 본래 의미와 다르게 소비하거나 희화화할 때
- 맥락 탈색: 문화의 역사적 배경을 무시한 채 시각적 장식으로만 사용할 때
- 권력 불균형: 문화적 주체보다 경제적 주체가 이익을 독점할 때
특히 패션 업계에서는 문화 도용이 빈번히 문제로 지적됩니다.
최근 Superdry가 리브랜딩을 단행한 것 역시, 문화 차용의 한계에 직면한 결과일 수 있다는 해석이 나옵니다.
*관련 아티클 읽어보기
- Cultural Borrowing vs. Appreciation: Protecting Authenticity While Staying Global
- Cultural Sensitivity in Brand Design: Navigating the Gray Area between Appropriation and Appreciation
4. 브랜딩에서 진정성(Authenticity)이란 무엇일까?
문화 차용의 시대, 브랜드의 진정성은 출신이 아니라 태도에 달려 있습니다.
타 문화의 언어를 빌리더라도,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고 존중하며 새로운 가치를 더하느냐가 관건입니다.
진정성(Authenticity)은 더 이상 '원산지'를 뜻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른 문화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만의 시선을 얼마나 솔직하게 드러내는가, 그 태도야말로 오늘날 브랜드 진정성의 핵심입니다.
5. 마무리하며
문화 차용 브랜딩은 모방과 창조, 존경과 소비의 경계 위에 서 있습니다.
그 경계 위에서 브랜드가 스스로의 언어를 세우는 순간, 타인의 문화는 단순한 장식이 아닌 새로운 정체성의 언어가 됩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무엇을 빌렸는가가 아니라, 어떻게 이해했는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