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만 존재하는 독특한 기업 형태가 있습니다. 바로 '재벌'인데요, 이 단어는 옥스퍼드 영어 사전에 'Chaebol'로 등재되어 있을 정도랍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재벌=대기업' 공식이 성립하고 있는데요, 오늘은 대표적인 재벌 기업 중 하나인 CJ의 로고 변천사를 통해 기업이 오랜 역사 동안 어떻게 진화하고 발전해 왔는지 살펴볼까 합니다.
1. 설탕 제조 기업, 제일제당의 탄생
제일제당은 1953년 삼성그룹의 창업주이기도 한 이병철 회장이 설립한 기업으로 시작했습니다. 지금은 설탕이 너무나 보편화되어 있지만 당시는 '신문물'이었고, 제일제당은 우리나라 최초로 설탕을 생산한 기업입니다.
사명을 보면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두 단어가 함께 있어요. 바로 '제당'과 '공업'인데요, 현대인의 관점에서는 부정적 이미지이지만 당시 첨단 기술인 '가공 식품'을 표현하기 위한 단어라고 생각돼요. 그때는 '가공'이 희귀했기에 프리미엄 이미지가 있었을 것이예요. 현대는 '천연'과 '유기농'이 프리미엄 이미지를 갖게 되는 것과 비교되죠.
또, 처음 사용한 영문 이니셜은 CS인데요, 아마 Cheil Sugar의 약칭이 아닐까 추측합니다.
2. 장수 브랜드, 백설표를 앞세우다
1965년에 우리나라 대표 장수 브랜드 중 하나인 '백설표'가 탄생했어요. CJ는 브랜드 관리가 매우 훌륭한 기업 중 하나인데요, 이 때부터 브랜드에 선구적인 혜안을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어요. 사실 당시는 브랜드 개념이 거의 없었고, 기업 브랜드와 제품 브랜드를 동일하게 사용하는 경우가 보편적이었거든요. 아직도 제품 브랜드를 앞세우고, 기업 브랜드는 보조적인 역할을 하는 전략을 이해 못하시는 '윗분'들이 가끔 있는데요, 제일제당 사례는 그런 분들에게 훌륭한 사례가 될 수 있죠.
개인적으로 '백설' 브랜드 네임과 로고를 좋아하는데요, 특히 눈의 결정을 심플하게 형상화한 1974년 로고는 레트로가 유행인 지금 사용해도 인기가 많을 것 같아요.
3. CJ 어원의 탄생, 영문 CI 개발
이 로고를 기억하시나요? 당시 대대적인 TV광고를 했어서, 아마 Z세대 이후를 제외하고는 모두 알 것 같아요. 1996년 로고 디자인은 지금 감각으로 보면 살짝 촌스럽고, 밸런스가 안 맞는다는 느낌이 들 수 있는데요, 그때는 나름 획기적인 디자인으로 화제가 되었어요. 한국을 대표하는 빨강과 파랑, 두 색의 조합과 국문명칭에 있는 'ㅇ'을 형상화한 그래픽 요소가 특징입니다. 아래 한글 로고를 보시면 디자인 의도를 이해하실 수 있을 것이예요.
이 로고 디자인은 일본의 디자인 회사 PAOS(파오스)에서 개발했는데요, 지금은 거의 활동을 안하지만 당시는 세계적인 디자인 회사로 알려졌어요. 그 때의 '일본'은 선진국, 글로벌 수준이라는 이미지가 강했고, 디자인 역시 일본이 최고라는 인식이 있었거든요. '브랜딩'이라는 용어보다 '데코마스 DECOMAS - DEsign Coordination as a MAnagement Strategy'라는 용어가 사용되기도 했죠. 참고로 PAOS는 제일제당 외에도 한샘 로고를 개발했어요. (PAOS에서 개발한 디자인 보기)
아무튼 이 로고 디자인으로부터 CJ라는 명칭이 탄생하게 됩니다. 사실 한글로는 똑같은 'ㅈ' 자음인데요, 영문에서는 C와 J로 다르게 표현하고 있어요. 'ㅈ'을 영문으로 표기할 때 Ch와 J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네임의 총 길이를 생각하면 Ch보다는 J가 선호되기 마련이죠. 그런데 '제일'이라는 이름이 우리나라에서는 누구나 다 좋아하는 의미이지만, 영어에서는 감옥을 의미하는 'Jail'과 발음이 같아 글로벌 브랜딩 시 항상 제기되는 이슈거든요. 거기다 표기까지 Jeil로 하게 되면 영락없이 Jail을 연상하게 되는 것이죠. 그래서 네이미스트로 추측해보자면, 부득이하게 앞쪽의 'ㅈ'은 Ch로 표기하되, 뒤쪽의 'ㅈ'은 글자 수를 줄이기 위해 J로 표기한 것이라 생각됩니다.
CJ라는 이니셜 네임은 다소 독특한 조합이라고 볼 수 있고요, 이 때문에 제일제당은 사명 변경 이슈가 끊임없이 나오고, 변경했다가도 다시 제일제당으로 돌아올 수 밖에 없는 태생적 딜레마를 갖게 됩니다. 이 이야기는 마지막에 다시 얘기할께요.
4. 생활문화가 피어납니다, Blossoming CJ
드디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CJ의 대표 로고 디자인이 등장했습니다. (위 로고 이미지는 인터넷에서 검색하여 찾은 것이라 색상이 정확하지 않을 수 있어요.) 저는 운 좋게도 이 로고 디자인의 탄생을 옆에서 지켜볼 수 있었는데요, 바로 저의 첫 회사인 '소디움파트너스'에서 이 프로젝트에 참여했기 때문이죠. 비록 저는 네이미스트여서 디자인 개발에 참여하거나 프리젠테이션에 참여하지는 못했지만 회사 내에서 무척 중요하게 생각했었기에 진행 과정은 익히 알고 있어요. 단, 간접적으로 전해 들은 이야기인데다가, 시간이 오래 되어서 기억에 오류가 있을 수 있다는 점 미리 말씀드릴께요.
당시 제일제당은 설탕 뿐 아니라 '다시다' '햇반' 등 식품 전반을 아우르는 제품 군을 갖고 있었고, 계열사로 제약 회사, 엔터테인먼트 회사 (CJ Entertainment), 영화관(CGV) 등이 있었어요. 더 이상 이름 그대로의 설탕 제조 기업이 아니었던 것이죠. '제일제당'이라는 사명이 그룹의 속성과 위상을 담기엔 한계가 있다는 판단이 있었고, 그 동안 약칭으로 사용해왔던 네임인 'CJ'를 그룹 브랜드로 사용하기로 결정합니다. 이름이 변경되었으니 당연히 새로운 로고 디자인도 개발이 되어야겠죠?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재벌 기업 중 하나인 CJ의 새로운 로고 디자인은 모두가 탐내는 프로젝트였어요. CJ 역시도 무척 중요하게 생각했기에 개발 및 선정 과정이 무척 까다롭고 길었는데요, 지금은 거의 안하는 추세이지만 당시는 너무나 당연했던 시안 비딩을 통해 업체 선정을 했어요. 1차 비딩은 새로운 네임인 CJ에 걸맞는 새로운 디자인을 개발하는 것이었는데요, 안타깝게도 선정된 디자인이 없었어요. 아마도 PAOS에서 개발한 디자인에 애착이 많았던 것 같아요. 2차 비딩은 1차 비딩에서 우수한 디자인을 보여준 소수의 에이전시로 참여사를 압축하고, 1996년 로고 디자인의 빨강파랑 동그라미를 계승하는 디자인 개발을 과제로 냈습니다.
20여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그 때 개발한 시안 디자인을 기억해요. 동그라미로 그릴 수 있는 각종 디자인 시안은 다 봤던 것 같아요. 디자이너들이 밤샘을 밥먹듯이 하며 정말 고생을 많이 했고, 훌륭한 디자인도 많았어요. 이번엔 우리회사의 디자인이 선정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지만, 항상 변수는 발생하기 마련이기에 조마조마하면서 프리젠테이션 결과를 기다렸는데요, 안타깝게도 경쟁사였던 데그립고베(Desgrippes Gobe)의 디자인이 최종 선정됐다는 결과를 받았죠.
데그립고베는 브랜드비의 다른 글에서 잠깐 언급한 적이 있는데요, 당시 브랜딩 관련 저서가 몇 개 없던 시절, <감성 디자인, 감성 브랜딩>이라는 책으로 업계에 '감성 브랜딩' 열풍을 불러일으켰던 프랑스의 브랜딩 에이전시예요. 패키지 디자인을 잘 하는 것으로 유명했고, 지금은 SGK로 이름이 변경되었습니다. (에이전시 검색 고고! 다만 최근 브랜딩 프로젝트가 거의 없어요.)
최종 선정된 데그립고베의 디자인은 저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는데요, 왜냐면 과제인 빨강파랑 동그라미를 사용한 디자인이 아니었던 것이죠! 정직하게 과제를 수행한 동료 디자이너들이 너무 억울하다는 생각에 화도 났었어요. 그런데 데그립고베의 디자인 의도를 들으니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게 되더라고요. 단순 예쁘고 멋있는 스타일링이 아닌 '정체성'을 표현해야 하는 CI 디자인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어요. 데그립고베의 디자인 의도는 다음과 같습니다. (주의! 제가 직접 들은 것이 아니라서 의도를 상상하여 썼어요.)
"CJ 그룹은 기존 메인으로 영위하던 식품 사업 외에도 제약, 영화, 유통 등 다양한 사업을 영위하고 있습니다.
이 다양함은 빨강과 파랑 두 개의 동그라미로 대표하는 데 한계가 있고, 또 부족합니다.
우리는 기존의 빨강과 파랑에 오렌지 색을 추가하여 CJ의 핵심 가치인 '건강, 즐거움, 편리'를 표현했습니다.
또 꽃잎과 같은 형태를 통해 CJ가 만들어가는 새로운 문화가 피어난다는 의미를 담았습니다"
어떤가요? 비록 요구한 디자인 과제를 수행한 것은 아니지만, 누구나 다 납득이 가는 디자인 의도 아닌가요?
훌륭한 브랜딩 에이전시는 전문가로서 클라이언트의 요구 그 이상을 보여주고 설득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 계기이기도 합니다. 다만 예나 지금이나 우리나라 문화에서는 쉽지 않은 일입니다.
다행히 고생한 바가 헛되지 않게 소디움파트너스는 디자인 시스템과 가이드라인을 정리하는 업무를 맡게 되었어요. 외국 디자인 에이전시에서 브랜딩 개발을 할 때 가장 큰 문제 중 하나가 현지화, 즉 한국화 거든요. 한글이나 우리나라 현장 환경에 대한 이해도가 낮기 때문에, 외국 에이전시가 개발한 디자인을 실제 사용하는 데 있어 애로사항이 많이 발생합니다. 그래서 대부분 외국 에이전시가 참여한 브랜드 개발 프로젝트는 꼭 우리나라 에이전시가 파트너로 붙어 있어요. 다만 중요도나 가치는 메인 로고 디자인 개발이 디자인 시스템 정리보다 훨씬 크기 때문에 아쉬운 부분이기도 하죠.
5. 전용서체 개발을 통한 진화
개인적으로 2002년 로고 디자인에서 아쉬웠던 부분이 있다면 바로 서체인데요, 가늘고 뾰족한 세리프 서체가 풍성한 그래픽 심볼과 잘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단순히 CJ 글자만 보면 나쁘지 않은데, 계열사 명을 표기하면 뾰족뾰족한 세리프가 거슬리더라고요. 다만 그때 저는 디자이너가 아니었기에 왜 서체를 바꿔야 하는지에 대한 명분과 이유를 찾지 못했어요. 단순히 개인적 취향과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저와 비슷한 생각을 했던 사람이 많았던 모양입니다. 2011년 드디어 전용서체 개발을 통해 서체를 변경하게 된 것입니다.
당시는 현대카드의 CI 디자인이 엄청난 화제여서 기업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전용서체 개발을 도입하고 있었어요. 이 흐름을 타고 CJ도 전용서체를 개발했습니다.
CJ그룹의 영문서체 디자인은 현대카드 CI 디자인을 개발한 Total Identity (지금은 Total Design)에서 개발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국문서체 디자인은 기억에 혼선이 있어 확실하지 않습니다. 아시는 분은 제보해주세요!)
새로운 전용 서체가 사명에 적용된 사례를 보면 확실히 가독성 및 가시성이 개선된 것을 알 수 있어요. 그래픽 심볼과의 밸런스도 좀 더 개선되었습니다. 서체 디자인 변경은 일반인은 거의 알아차리지 못하는 변화인데요, 트렌드를 반영하면서도 브랜드의 정체성을 잃지 않는 좋은 전략이라고 생각해요. 다만 굳이 꼭 브랜드 전용 서체를 개발할 필요는 없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어요. 세상에는 정말 많은 다양한 서체 디자인이 존재하거든요. 또 계속해서 유행하는 서체 트렌드도 변하고요. 트렌드에 맞는 기존 서체를 적절히 선택하여 일정기간 사용하는 것도 스마트한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6. 끝나지 않는 숙제, 사명 변경
이상으로 제일제당과 CJ의 로고 변천사를 살펴봤는데요, 마지막은 CJ그룹의 정신적 지주이자 핵심 회사인 '제일제당'의 사명에 대한 이야기를 할까 합니다.
제일제당 사명의 한계점은 너무나 명확해요. 더 이상 설탕만 만드는 기업이 아닌데, 여전히 사명에 '제당'을 쓰고 있죠. 그룹 명칭을 CJ로 변경할 때 부터 제일제당의 사명 변경은 계속 논의되어왔어요. 그러나 20여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제일제당이라는 사명을 사용하고 있죠.
최근 기업 명칭에서 업종을 떼거나 숨기는 트렌드 변화가 있는데요, 이와 함께 항상 언급되는 것이 제일제당과 매일유업입니다. (관련기사 읽어보기)
상대적으로 매일유업은 변경이 용이해요. 메인 브랜드 커뮤니케이션을 '매일 Maeil'로 해왔기 때문이죠. 그런데 제일제당의 '제당'은 CJ라는 그룹 명칭의 어원의 50%를 담당하고 있기에, '제당'을 없앨 경우 그룹 브랜드의 정체성에 혼란이 발생하게 됩니다. 통상적으로 두글자로 된 이니셜로 그룹 명칭을 변경할 경우 각 이니셜에 갖가지 의미부여를 하는데요, 사실 냉정하게 바라보면 아무도 그 의미를 알려고 하지 않고 또 기억하지도 않아요. 그저 내부조직 안에서의 명분 및 설득력을 갖기 위한 작업일 뿐이죠.
그런데, 최근 기사에 따르면 제일제당은 현재의 사명을 유지하기로 결정했다고 합니다. (관련기사 읽어보기) 이는 제일제당이 갖는 상징성과 인지도에 좀 더 가치를 두고 있다고 볼 수 있어요. 사실 대한민국 그 누가 제일제당이 설탕만 만드는 회사로 알고 있을까요? 해외에서는 의미를 알 수 없는 한글 고유명사로 인지될 터이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일제당의 사명 변경 논란은 계속 될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그 이유를 커뮤니케이션이 빠르고 효율적인 짧은 브랜드 네임을 선호하는 한국의 문화적 특수성 때문이 아닐까 추측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수십년간 사람들의 뇌리에 박인 인지도를 변화시키기는 쉽지 않습니다. 과감히 'HY 에치와이'로 변경했던 한국야쿠르트도 최근에는 다시 '한국야쿠르트'를 병기하고 있다고 해요. 최근 '롯데웰푸드'로 사명을 바꾼 '롯데제과'도 새로운 이름으로 자리잡을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언젠가 제일제당이 'CJ제일' 이나 'CJ푸드'와 같은 이름으로 변하는 날이 올까요?
마무리하며...
CJ는 2002년 그룹 명칭과 로고 디자인 변경을 통해 고유의 정체성을 성공적으로 만들어냈어요.
CI 디자인 개발과 관련한 비하인드 스토리를 통해 브랜딩 에이전시의 역할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되었구요,
제일제당 사명 변경 이슈를 통해 브랜드의 역사 속에서 갖게 되는 사명의 상징성과 의미를 되돌아봤습니다.
항상 드리는 말씀이지만 브랜딩에 정답은 없습니다. 다만, 우수한 브랜딩 사례를 통해 브랜드에 맞는 방향성을 모색해 볼 수 있을 것이예요.
단언컨대 CJ는 교과서적인 모범 사례라고 할 수 있어요. 꾸준히 진화하고 발전하는 CJ의 다음 행보를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