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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의 도시브랜딩

최근 우리나라의 양대 도시, 서울과 부산이 도시 브랜딩을 위해 대국민 선호도 조사를 진행했죠. 그런데 사실 개인적으로 슬로건 후보안에 대한 평가나 호불호를 떠나 "왜 브랜딩을 해야하는지"에 대한 이해가 잘 가지 않았어요. 브랜딩의 명확한 목표, 그리고 기대 효과가 무엇인지 알 수 없었거든요. 우리나라의 대부분의 도시 브랜딩이 "도시"를 위한 브랜딩이 아니라 "시장(市長)"을 위한 브랜딩인 경우가 많아요. 시장이 바뀌면 항상 도시 브랜드 개발이니, CI 디자인, 슬로건 개발 등등의 프로젝트 공고문이 뜹니다. 브랜딩으로 먹고 사는 직업을 가진 사람으로서 새로운 일거리가 생기는 것은 참 반가운 일입니다만, 한편으로는 사용 기간이 한정된 휘발성 브랜드 개발이 공허하기도 해요.

도시브랜딩의 모범 사례로 항상 회자되는 것이 뉴욕의 <I Love NY>, 암스테르담의 <I Amsterdam>, 멜번의 < City of Melbourne> 등인데요, 저는 이번에 다른 관점으로 도시브랜딩을 이야기해 볼까 합니다. 바로 세계에서 가장 많은 여행객이 방문하는 도시, 싱가포르를 통해서 말이죠.



1. 검증된 싱가포르의 도시 브랜드 가치


제가 왜 싱가포르를 도시브랜딩의 우수사례로 드는지 근거를 제시해 볼게요.





비록 지난 3년 간 COVID19 로 인해 여러가지 변수가 있었습니다만, 싱가포르가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고 싶어하는 도시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 같습니다.




2. 싱가포르의 브랜딩 현황


그럼 싱가포르는 어떻게 브랜딩을 하고 있을까요? 싱가포르는 세계에서 드문 도시이면서 국가이기도 한 사례인데요, 일단 '도시'로 생각하고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싱가포르의 브랜딩은 2017년에 대대적으로 이뤄졌어요.



도시브랜딩 : SG 인장

뉴욕=NY, 홍콩=HK처럼 상징적인 축약형으로 인지되고자 하여 SG인장을 개발했다고 합니다.



관광 슬로건 : PASSION MADE POSSIBLE 열정이 가능성을 만드는 곳

세계 10여개국 4,500명 대상 싱가포르에 대한 설문조사를 진행한 결과 가장 많은 표를 얻은 "Passion"과 "Possible"을 조합하여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좀 많이 생소하죠? COVID19의 영향으로 봐야할지, 싱가포르가 광고홍보를 적극적으로 하지 않은 건지 모르겠습니다만, 브랜드 자체는 잘 알려지지 않은 것 같아요. 역설적으로 싱가포르를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로고 또는 슬로건의 영향이 거의 없다는(안타깝게도!!!) 반증이기도 합니다.




3. 싱가포르의 성공적 도시 브랜딩은 정체성(Identity)에 있다.


저는 브랜딩이란 '정체성-Identity'을 네임과 로고, 슬로건을 통해 '이미지- Image'를 만드는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보면, 지렛대의 중심을 이동하여 작은 힘으로 무거운 물체를 들어올리는 것처럼, 또는 프리즘처럼 한줄기의 빛이 투과되어 다채로운 스펙트럼을 만드는 것처럼, 브랜딩 작업을 통해 브랜드 자체가 시너지를 얻고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죠. 그런데 아무리 브랜딩을 잘 하려고 해도, 그 근원인 정체성이 제대로 정립되지 않으면 껍데기에 불과한 공허한 브랜딩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반대로, 탄탄한 정체성을 가진 브랜드는 브랜딩 없이도 강한 힘을 발휘합니다.(이렇게 훌륭한 브랜드들만 있다면 제 직업은 존재하지 않았겠지만요.)

싱가포르는 바로 이 탄탄한 정체성을 가진 도시입니다. 도시의 정체성은 여러가지 복잡한 요소로 구성되기 마련인데요, 저는 역사문화적인 측면과 정책적인 측면 두 가지만 살펴볼까 해요. (체계적이고 논리적인 분석은 위의 링크를 참조하세요.)



의도적으로 개발한 도시국가, 싱가포르



싱가포르의 탄생 자체가 오랜 역사를 지닌 다른 대형 도시들과는 조금 달라요. 19세기 영국의 래플스 경이 깡촌이나 다름없던 섬을 무역항으로 개발하면서 도시가 되었거든요. 도시민 역시 다른 국가에서 이주해온 사람들이 대다수입니다. (중국,말레이시아,인도 3개국에서 이주해온 사람이 96%가 넘습니다.) 싱가포르의 공식언어가 무려 4개나 되는 것을 보면 그 문화의 복잡성과 다양성을 미뤄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해낸 역사, 그리고 다름을 인정하고 권장하는 다양성이 싱가포르의 근간에 깔려 있는 것 같아요.




강력한 싱가포르 정부의 정책들


블과 10여년 전만 해도 '싱가포르' 하면 떠오르는 것이 별로 없었어요. 몇몇 유명한 음식(그 중 대부분은 이웃나라와 공유하고 있었죠)과 아열대의 더운 날씨, 그리고 도시의 깨끗함 정도랄까요? 그런데 최근에는 건축학도라면 필수로 방문해야 할 현대건축의 실험장으로 손에 꼽히고, 관광객들에겐 럭셔리 휴양지로 각광받고 있죠. 또 홍콩을 제치고 아시아의 금융허브로 떠오르고 있어요.(국내 블록체인 기업들이 대부분 싱가포르에 법인을 설립한 것만 봐도 알 수 있어요.)

이는 싱가포르 정부의 MICE산업 개발과 개성이 없는 건축물은 허가하지 않는 적극적 디자인 다양성 지원, 정원도시(Garden City)를 넘어 '정원 속 도시(City in the Garden)'을 지향하는 비전, 홍콩이 주춤하는 새를 틈타 아시아 1위로 자리매김한 대외 개방형 경제 정책 덕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글로 쓰자니 간단하지만, 실제로는 장기간의 지속적인 계획 및 실행, 투자와 지원이 필요한 것들입니다. 최근 환골탈태한 싱가포르의 모습을 보면서 감탄을 금하지 못했습니다.


아래는 이러한 역사문화와 정책을 통해 탄생한 싱가포르의 상징물들입니다. 전세계의 수많은 관광객들이 싱가포르를 방문하고 싶게 만드는 요소들이죠.



4. 싱가포르의 다양한 상징물



첫번째 : 머라이언(Merlion)


머라이언은 사자(Lion)와 인어(Mermaid)를 합성한 네임으로, 사자는 싱가포르의 어원을, 인어는 항구도시인 특성을 표현한다고 합니다. 머라이언은 1964년 Alec Fraser-Brunner가 싱가포르 관광청을 위해 디자인했다고 하는데요, 당시에는 다소 드물고 독특했던 하이브리드 컨셉이 요즘에 더 빛을 발하는 것 같습니다. 다양한 문화가 결합하여 탄생한 싱가포르의 정체성과도 잘 어울리는 것은 물론이고요.



두번째 : 마리나베이 샌즈 호텔


MICE산업을 활성화하기 위해 카지노를 도입할 때 막대한 반대에 부딪혔다고 해요. 그런데 덕분에 싱가포르의 랜드마크이자 럭셔리 호텔의 아이콘이 탄생했습니다. 세 개의 기둥에 배를 얹은 이 독특한 건축물은 수영장을 건물 맨 윗층으로 올린 역발상과 극악의 건축 난이도로 인해 설립 당시 엄청난 화제를 모았었는데요, 10여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핫플레이스로 각광받고 있어요. 무려 2,500개나 되는 고가의 객실들이 거의 가득 찬다고 하니, 정말 대단합니다.


세번째 : 슈퍼트리


영화 <아바타>의 영감을 받아 만들어졌다는 설이 있는 인공의 거대한 나무, 슈퍼트리. 사실 슈퍼트리는 싱가포르 정부의 정원도시 정책의 일환으로 2006년에 경연을 통해 당선된 작품입니다. (아바타보다 전이죠! 그런데 현재 슈퍼트리가 있는 지역에서 아바타 전시가 열리고 있으니 서로 윈-윈하는 마케팅 전략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특히 야간에 슈퍼트리의 조명과 음악이 어우러진 쇼는 관광객들의 찬사를 받고 있습니다.




네번째 : 주얼창이


역시 정원 속 도시의 비전 하에 탄생한 프로젝트입니다. 창이공항 옆에 위치한 거대한 복합 쇼핑몰로 세계에서 가장 높은 실내 폭포로 유명합니다. 더 이상 쇼핑몰이 단순히 규모만 키워서는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했죠.



다섯번째 : 바샤커피


마지막은 가장 신생의, 가장 핫한 브랜드로 마무리할까 합니다. 앞서 말한 상징물들과 다소 규모에서 차이가 납니다만, 그 영향력은 못지 않은 것 같아요.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커피의 에르메스'라는 별명으로 불리고 있는데요, 사실 2019년에 TWG에서 만든 커피 브랜드입니다. 1910년 마라케시에 존재했던 공간의 이미지를 차용하여, 오롯이 제 것으로 만들어 버렸는데요(많은 사람들이 바샤커피가 100년이 넘은 역사를 지닌 것으로 오해하고 있답니다.) 아름다운 인테리어와 패키지, 차별화된 매장에서의 경험이 바샤커피를 단숨에 명품의 반열에 올려 놓았습니다.

지극히 현대적인 싱가포르 번화가 한 복판에 아랍풍 인테리어의 커피 숍에서 모로코 복장을 한 커피 전문가들이 커피를 서빙하고 있는 모습이 전혀 어색하지 않은 것은 왜일까요? 과거와 현대, 그리고 인공과 자연이 위화감 없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싱가포르만의 정체성 때문일 것입니다.



이상으로 제가 생각하는 싱가포르의 다섯 가지 상징물들을 살펴봤는데요, 이들을 관통하는 싱가포르의 정체성이 느껴지시나요?

명확하게 하나의 그림이나 문구로 정의하지 않아도 '정체성'은 존재합니다. 사람에 따라, 관점에 따라 조금씩 다른 모습으로 투영될 뿐이죠. 때론 "브랜딩" 자체에 집착해서 브랜드의 본질을 잊고, 겉모습에 연연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겉모습의 치장보다 먼저 잃어버린 정체성을 찾고, 바로 세워야 하는 것이 우선순위가 아닐까요? 만약 없다면 새로 만들어 꾸준히 지원해야 하고요. 무에서 유를 만들어낸 싱가포르처럼 말이죠.

2023 FE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