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영어권 브랜드가 로고를 디자인할 때, 한 가지 고민이 생깁니다.
자국어를 우선시해서 디자인할 것인가, 영어를 우선시할 것인가? 아니면 둘 다 디자인해야 할까?
최근에는 영문 로고를 우선시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지지만, 비영어권 디자이너라면 한 번쯤 고민해봤을 문제일 것입니다.
과거, 특히 막 브랜드가 도입되었을 당시 우리나라의 브랜드 로고를 살펴보면 영문에서 유래한 브랜드 네임이라도 한글 로고로 디자인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당시에는 영어가 보편화되지 않았기에(영어가 중등교육의 필수 교과과정으로 채택된 것은 1954년, 초등교육의 정규 과목으로 채택된 것은 1997년입니다), 국내 소비자에게 익숙한 한글로 브랜드를 알리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영어 유래 네임이지만 한글 로고를 메인으로 사용하는 사례들>
하지만 최근 우리 주변의 브랜드를 살펴보면 한글 로고를 별도로 개발하지 않고 영문 로고만 사용하는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중국도 비슷한 변화를 겪고 있습니다. 중국에서는 영문 브랜드 네임과 함께 한자 브랜드 네임도 개발하는 것이 일반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한자 로고 없이 영문 로고만 사용하는 사례도 눈에 띕니다.
< 해외 브랜드이지만 한자 로고로 표현한 중국 스타벅스(왼쪽) © Starbucks vs. 중국 브랜드이지만 영문 로고로 표현한 Manner Coffee(오른쪽) © Manner Coffee >
이러한 변화에는 현실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브랜드가 글로벌 시장을 지향한다면 국가와 언어에 따라 다른 로고를 사용하는 것보다 하나의 영문 로고를 공통으로 사용하는 편이 효율적입니다. 브랜드 인지도를 집중적으로 축적할 수 있고, 다양한 매체와 접점에서 일관된 아이덴티티를 유지하기도 쉽습니다.
영문 로고가 가진 이미지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영어는 국제적이고 현대적이며, 때로는 세련된 이미지를 전달하는 수단으로 활용됩니다. 반면 한글 로고는 상대적으로 전통적이거나 국내 시장에 한정된 이미지로 받아들여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 브랜딩 업계의 디자인 환경도 이러한 추세와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영문 로고 디자인에는 익숙하지만, 한글의 조형적 특성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거나 매력적인 한글 로고타입으로 발전시키는 데 어려움을 느끼는 디자이너를 꽤 많이 봅니다. 영문 로고를 선호하는 시장의 요구와 디자이너의 경험이 맞물리면서 이러한 경향이 더욱 강화되는 것은 아닐까요?
물론 영문 로고를 사용하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글로벌 브랜드를 운영하는 데 있어 합리적인 전략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효율성이라는 명목으로 자국어를 포기하거나 도외시하는 것이 당연한 선택일까요?
이번에 소개할 하이브리드 언어 로고(Hybrid Language Logo)는 조금 다른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서로 다른 두 언어를 나란히 표기하거나 같은 스타일로 디자인하는 것이 아니라, 두 문자 체계를 하나의 형태로 결합하는 방식입니다. 하나의 로고가 영어 사용자에게는 영문으로, 자국어 사용자에게는 자신의 문자로 읽히도록 설계하는 것이죠. 글로벌 시장에서의 활용성을 고려하면서도 자국의 언어와 문화적 정체성을 유지하려는 시도입니다.
주: 하이브리드 언어 로고는 공식적으로 정립된 용어는 아닙니다. 이중 언어 로고(Bilingual Logo) 중 문자 형태가 서로 결합된 디자인(Intertwined / Combined)의 특징을 설명하기 위해 브랜드비가 임의로 지은 명칭입니다.
< 이중 언어 로고 유형 분류 by 브랜드비 >
이번 글에서는 아랍어와 영어, 한자와 영어를 결합한 8개의 사례를 통해 하이브리드 언어 로고의 디자인적 특징과 그 안에 담긴 브랜딩 전략을 살펴보겠습니다.
하이브리드 언어 로고 I. 아랍어와 영어의 결합
지금까지 발견한 하이브리드 언어 로고 중에는 아랍어와 영어를 결합한 사례가 특히 많습니다.
아랍어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고, 글자들이 서로 연결되는 독특한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반면 영어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읽으며 개별 알파벳을 조합합니다. 이렇게 서로 다른 문자 체계를 하나의 로고로 결합하는 것은 상당히 까다로운 디자인 과제입니다. 그럼에도 중동 지역에서는 글로벌 커뮤니케이션과 자국의 문화적 정체성을 함께 표현하기 위해 다양한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01. Saudi Now by Alphabetical
Saudi Now는 사우디아라비아와 영국의 문화 교류를 위한 플랫폼입니다. 예술, 영화, 사진, 음악, 패션, 교육 등 다양한 분야에서 두 나라의 문화적 교류와 협력을 촉진하고 있습니다.
브랜딩을 담당한 영국의 Alphabetical은 두 나라의 언어를 하나의 로고로 결합했습니다. 영문 산세리프와 아랍어 캘리그래피의 특징을 함께 활용해 영어와 아랍어 사용자 모두가 읽을 수 있는 워드마크를 개발한 것입니다.
특히 흥미로운 점은 디자인 과정에서 가독성을 검증했다는 사실입니다. 서로 다른 연령대의 영어 및 아랍어 사용자들을 대상으로 테스트하며 두 언어가 자연스럽게 인식되는지 확인했다고 합니다. 두 문화의 교류를 목적으로 하는 플랫폼이기에, 두 언어를 동등하게 표현하는 것 자체가 브랜드의 정체성을 전달하는 방법이 된 셈입니다.
02. Ceer by Dentsu Creative
Ceer는 사우디아라비아 최초의 전기자동차 브랜드입니다. 사우디아라비아가 추진하는 산업 다각화 전략과 함께 탄생한 브랜드로, 자국의 자동차 산업을 육성하면서 글로벌 시장으로 진출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습니다.
2025년 공개된 새로운 로고는 영어 Ceer와 아랍어 سير를 결합했습니다. 브랜드 측은 이를 자동차 업계 최초의 아랍어·영어 이중언어 로고타입이라고 소개했습니다.
Ceer는 아랍어로 '앞으로 나아가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이처럼 브랜드 네임부터 자국의 언어에서 출발했지만, 글로벌 시장에서도 통용될 수 있도록 영문과 아랍어를 하나의 로고에 담았습니다.
특히 국가적 상징성이 큰 자동차 브랜드라는 점에서 자국의 문화적 정체성과 글로벌 브랜드로서의 지향점을 함께 표현하려는 의도가 돋보입니다.
03. Dubai by M&C Saatchi
두바이는 세계적인 관광 및 비즈니스 도시입니다. 다양한 국적과 문화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모이는 도시이지만, 동시에 아랍에미리트의 역사와 문화를 바탕으로 성장해 왔습니다.
2014년 공개된 도시 브랜드 로고는 영어 Dubai와 아랍어 두바이 표기를 하나의 형태로 결합했습니다.
디자인을 담당한 M&C Saatchi는 서로 다른 문화가 만나는 도시라는 두바이의 특징을 로고에 반영했습니다. 디자인 리드를 맡았던 Samar Maakaroun은 두 언어를 조화롭게 결합해 도시의 정체성을 표현했다고 설명합니다. 영어와 아랍어는 읽는 방향부터 다릅니다. 하지만 두바이의 로고에서는 서로 다른 방향과 형태가 하나의 조형적 구조를 이루고 있습니다.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는 도시라는 정체성을 두 언어의 결합을 통해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04. Zayed National Museum by Bruce Mau Design
Zayed National Museum은 아랍에미리트의 역사와 문화를 소개하는 국립박물관입니다. 국가의 건국과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한 초대 대통령 셰이크 자이드의 유산을 기리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브랜딩을 담당한 Bruce Mau Design은 아랍어와 영어를 함께 활용한 비주얼 아이덴티티를 개발했습니다. 로고는 서로 다른 방향으로 읽히는 두 언어를 하나의 시각적 구성 안에 배치했습니다. 이는 서로 다른 역사와 문화가 하나로 엮인다는 박물관의 핵심 개념과도 연결됩니다.
앞선 사례들이 문자의 획과 형태를 결합하는 데 집중했다면, 이 사례는 두 언어의 방향성과 구성을 활용해 하나의 정체성을 표현한다는 점에서 조금 다른 접근을 보여줍니다.
특히 국가의 역사와 문화를 보존하고 전달하는 박물관이라는 점에서 아랍어를 영문과 동등하게 다루는 것은 단순한 디자인적 선택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하이브리드 언어 로고 II. 한자와 영어의 결합
한자와 영어의 결합은 아랍어와는 또 다른 특징을 보여줍니다.
한자는 하나의 글자가 의미를 가지며, 획을 조합해 글자를 구성합니다. 이러한 조형적 특성은 라틴 알파벳과 결합할 때 독특한 가능성을 만들어냅니다.
특히 한자의 일부 획을 영문 알파벳으로 활용하거나, 영문 로고 안에 한자를 숨겨놓는 방식이 흥미롭습니다.
05. True Friend 한국투자증권 by 디자인포커스
한국투자증권의 브랜드 슬로건이자 기업브랜드인 True Friend는 국내에서 꽤 오랫동안 사용되어 왔습니다.
흥미로운 부분은 Friend의 첫 글자인 F가 같은 의미를 가진 한자 '友(벗 우)'와 결합했다는 점입니다. 한자를 아는 사람은 友를 인지할 수 있지만, 영어로 읽으려는 사람에게는 장식적 요소로 보일 수 있습니다. 반대로 두 문자 체계를 모두 아는 사람에게는 영문과 한자가 뒤섞인 독특한 읽기 경험을 제공합니다. 당시 이 로고를 보고 "이건 트루 프렌드가 아니라 트루 우렌드야!"라고 불평하던 지인도 있었습니다.
하이브리드 언어 로고가 가진 의미적 장점과 가독성의 문제를 함께 생각해보게 합니다.
06. Bukkyo University by Nippon Design Center
일본의 Bukkyo University(佛教大学)는 2025년 약 30년 만에 비주얼 아이덴티티를 리뉴얼했습니다.
새로운 심볼은 대학명의 첫 글자인 한자 '佛'과 영문 B를 모티브로 개발했습니다. 두 문자의 조형적 특징을 결합해 하나의 심볼로 표현한 것입니다.
여기에는 대학이 추구하는 철학도 담겨 있습니다. 서로 손을 내밀고 지지하며 연결되는 사람들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표현했다고 합니다.
앞선 사례들이 브랜드 네임을 두 언어로 읽도록 설계했다면, Bukkyo University는 서로 다른 문자에서 공통된 형태를 발견하고 이를 하나의 상징으로 발전시켰습니다. 일본어 사용자에게는 한자 佛로도 읽힐 수 있다고 합니다. 한자와 영문을 결합하면서도 복잡한 로고타입이 아닌 간결한 심볼을 만들었다는 점이 특징입니다.
07. JEN by Shangri-La by Design Bridge
JEN은 글로벌 호텔 그룹 Shangri-La가 운영하는 호텔 브랜드입니다. 아시아 주요 도시의 문화와 라이프스타일을 경험할 수 있는 호텔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2021년 공개된 리브랜딩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영문 JEN과 한자 '仁(어질 인)'을 결합한 로고입니다. 仁은 자비와 배려, 인간적인 관계를 의미하는 한자입니다. 브랜드 네임 JEN 역시 이 한자에서 유래했습니다. Design Bridge는 영문과 한자를 하나의 로고타입으로 결합하면서 서로 다른 언어 사용자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브랜드를 인식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특히 한자 仁을 구성하는 人과 二의 형태를 활용해 사람과 사람의 연결이라는 브랜드 철학을 시각적으로 표현했습니다.
이 사례가 흥미로운 이유는 언어적 결합이 단순한 디자인 기교에 머물지 않기 때문입니다. 브랜드 네임의 유래와 철학, 디자인이 하나의 개념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08. BEI Hotel by Stepworks
BEI Hotel은 중국과 미국을 기반으로 전개된 호텔 브랜드입니다. 코리빙과 코워킹 개념을 도입해 글로벌 비즈니스 고객과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을 추구하는 여행객을 대상으로 기획되었습니다.
2019년 홍콩의 Stepworks가 공개한 로고는 영문 BEI 안에 한자 '北(북녘 북)'을 결합했습니다. BEI는 중국어로 北을 읽는 발음이기도 합니다. 즉, 영문 브랜드 네임과 한자의 발음이 연결되는 동시에 두 문자의 형태도 하나의 로고 안에서 결합됩니다.
특히 이 디자인은 한자를 처음부터 명확하게 드러내기보다 보는 사람이 숨겨진 글자를 발견하도록 유도합니다. Stepworks 역시 이러한 발견의 경험이 브랜드를 기억하는 데 도움을 주고 스토리를 만들어낸다고 설명합니다.
모든 사람이 두 언어를 동시에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처음에는 영문으로 인식했다가 나중에 숨겨진 한자를 발견하는 것만으로도 브랜드에 대한 새로운 인상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로고에 두 개의 언어를 담는다는 것
지금까지 살펴본 사례들은 서로 다른 문자 체계를 결합한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지만, 디자인 방식과 목적은 조금씩 다릅니다.
어떤 로고는 두 언어가 동시에 읽히도록 설계했고, 어떤 로고는 한쪽 언어를 먼저 읽은 뒤 다른 언어를 발견하도록 만들었습니다. 또 서로 다른 문자에서 공통된 조형적 특징을 찾아 하나의 심볼로 발전시킨 사례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이브리드 언어 로고는 일반적인 단일 언어 로고와 비교해 어떤 장점과 단점을 가지고 있을까요?
01. 하나의 로고, 서로 다른 읽기 경험
가장 큰 장점은 하나의 로고가 서로 다른 언어 사용자에게 각자의 방식으로 인식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영어 사용자에게는 영문 로고로, 자국어 사용자에게는 자신의 언어로 읽힐 수 있습니다. 두 가지 로고를 별도로 운영하지 않으면서도 서로 다른 언어를 활용할 수 있는 것이죠.
하지만 저는 이보다 더 흥미로운 부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두 언어를 모두 이해하는 사람이 경험하는 특별한 재미입니다.
영문으로 읽던 로고에서 갑자기 한자를 발견하거나, 아랍어로 읽던 글자가 영어로도 읽힌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 있습니다.
익숙한 문자를 낯설게 바라보게 되고, 하나의 로고에서 두 가지 의미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험은 단순히 로고를 읽는 것을 넘어 브랜드를 기억하게 만드는 계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특히 영문 로고가 많아진 상황에서 서로 다른 문자 체계를 결합한 디자인은 그 자체로 시선을 끌 가능성이 높습니다.
02. 가독성과 조형미의 균형, 개발과 활용의 제약
하지만 하이브리드 언어 로고가 언제나 효과적인 것은 아닙니다.
가장 큰 문제는 가독성입니다. 두 언어를 하나의 형태로 결합하려다 보면 어느 쪽에서도 자연스럽게 읽히지 않는 결과물이 나올 수 있습니다.
특히 서로 다른 문자 체계는 글자의 구조와 비례, 획의 연결 방식이 다릅니다. 아랍어처럼 읽는 방향까지 다른 경우에는 더욱 복잡해집니다.
브랜드 네임 자체의 제약도 있습니다. 두 언어에서 비슷한 형태를 가진 문자를 찾을 수 없다면 무리하게 결합해야 하고, 그 결과 로고가 지나치게 복잡해질 수 있습니다. 또한 한쪽 언어에서는 자연스럽게 읽히지만 다른 언어에서는 엉뚱하게 읽힐 가능성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디자인 과정에서 검증해야 할 사항이 많습니다. 각각의 언어에 익숙한 사용자에게 실제로 어떻게 읽히는지 확인해야 하고, 작은 크기에서도 식별할 수 있는지 검토해야 합니다.
단일 언어 로고보다 반드시 효율적인 것도 아닙니다. 하나의 로고로 통합하더라도 개발 과정에서 단일 언어 로고 두 개를 만드는 것보다 더 많은 시간과 비용이 필요할 수 있으며, 완성된 로고의 활용에도 제약이 생길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이브리드 언어 로고는 단순히 두 언어를 결합한다는 아이디어만으로 완성되는 디자인이 아닙니다.
서로 다른 문자 체계에 대한 깊은 이해와 정교한 조형 능력이 필요한 작업입니다.
하이브리드 언어 로고가 주목받는 이유 I. 디자이너에게는 매력적인 도전이다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하이브리드 언어 로고가 주목받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저는 그중 하나가 높은 디자인 난이도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로고를 만드는 일도 쉽지 않지만, 서로 다른 두 언어로 읽히는 로고를 만드는 것은 훨씬 까다로운 과제입니다. 두 문자 체계의 구조와 가독성을 모두 고려하면서도 결과물은 복잡하지 않고 자연스러워야 합니다.
태국 디자이너 Suchal Chaweewan의 Hybrid Thailand는 이러한 도전의 매력을 잘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이 디자인은 하나의 레터링이 영어로는 THAILAND, 태국어로는 ไทยแลนด์로 읽히도록 설계되었습니다. 두 언어를 모두 이해하는 사람에게는 하나의 형태에서 서로 다른 문자를 발견하는 독특한 경험을 제공합니다.
상용 브랜드의 로고가 아닌 개인 레터링 프로젝트이지만, Type Directors Club에서 수상하며 디자인적 독창성과 완성도를 인정받았습니다.
서로 양립하기 어려워 보이는 조건을 창의적으로 해결했다는 사실 자체가 높은 평가를 받을 만한 것이죠.
한편 디자이너가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서로 다른 문자로 읽히는 재미있는 사례들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갈아만든 배'입니다. 한글을 모르는 외국인들에게 제품에 적힌 '배'라는 글자가 영문 'IdH'처럼 보인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해외에서는 실제로 IdH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이는 스핀오프 제품인 숙취해소음료 '아이디에이치'가 탄생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갈아만든 배 & 아이디에이치 제품 이미지 © 해태HTB>
비슷한 사례로 '비비큐'의 영문 'bbq'가 숫자 '669'처럼 보인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비비큐는 이를 활용해 669 마케팅을 진행하고 있죠.
< 비비큐 669 데이 마케팅 이미지 인터넷 갈무리>
물론 두 사례 모두 의도적으로 하이브리드 언어 로고를 개발한 것은 아닙니다. 특히 '비비큐'와 669는 서로 다른 언어가 아니라 문자와 숫자 사이의 시각적 유사성입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흥미로운 공통점이 있습니다.
우리는 익숙하지 않은 문자를 보았을 때 자신이 알고 있는 문자나 숫자의 형태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한글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한글이 하나의 이미지로 보이고, 그 안에서 익숙한 알파벳이나 숫자를 발견하는 것이죠.
하이브리드 언어 로고는 이러한 시각적 인식의 가능성을 의도적으로 활용한 디자인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우연히 발견한 문자의 유사성을 하나의 완성된 로고로 발전시키는 것. 그것이야말로 디자이너의 창의성과 조형 능력이 발휘되는 지점이 아닐까요?
하이브리드 언어 로고가 주목받는 이유 II. 자국의 언어와 문화를 표현하는 또 다른 방법
이번에 소개한 사례들을 살펴보면서 흥미로웠던 점은 아랍어와 한자를 활용한 디자인이 많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두 문자 체계가 가진 독특한 조형적 특성이 영향을 미쳤을 것입니다. 라틴 알파벳과 형태적으로 다른 만큼 결합했을 때 예상하지 못한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으니까요.
하지만 저는 그 이면에 자국의 언어와 문화에 대한 자부심과 애정도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Saudi Now, Ceer, Dubai, Zayed National Museum과 같은 사례에서는 글로벌 시장과 소통하면서도 아랍어를 브랜드 아이덴티티의 중요한 요소로 유지하려는 의도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를 단순히 애국주의적인 관점에서 바라볼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글로벌 시장에서 영어는 효율적인 커뮤니케이션 수단입니다. 하지만 모든 브랜드가 영어를 중심으로 비슷한 방식의 아이덴티티를 구축한다면, 각 지역의 언어와 문화가 가진 고유한 특징은 상대적으로 드러나기 어려워집니다.
브랜딩은 단순히 많은 사람에게 이해시키는 일만은 아닙니다. 브랜드가 가진 고유한 정체성을 발견하고, 이를 차별화된 방식으로 전달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런 관점에서 하이브리드 언어 로고는 글로벌 커뮤니케이션의 효율성과 자국 문화의 정체성을 함께 고려한 흥미로운 시도입니다.
물론 모든 브랜드가 자국의 언어를 강조할 필요는 없습니다. 브랜드의 전략과 시장 환경에 따라 영문 로고가 더 적합할 수도 있고, 자국어 로고만 사용하는 것이 오히려 효과적일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서로 다른 언어와 문화를 하나의 형태에 담아내려는 시도는 충분히 주목할 만합니다.
이는 특정 국가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각기 다른 언어와 문화가 가진 가치를 존중하고 표현하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한글과 영어로 이뤄진 하이브리드 언어 로고를 기대하며
저는 하이브리드 언어 로고가 일반적인 단일 언어 로고보다 더 우수한 디자인 방식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앞으로 모든 브랜드가 지향해야 할 방향도 아닙니다.
다만 영문 로고가 보편화된 상황에서 서로 다른 두 언어를 하나의 형태로 결합한 디자인은 눈에 띌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두 언어를 모두 이해하는 사람에게는 예상하지 못한 발견의 즐거움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더욱 흥미롭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한글을 브랜드 아이덴티티에 활용하려는 다양한 시도가 있었습니다.
한글 초성을 심볼로 발전시키거나, 한글의 독특한 조형성을 시각적 아이덴티티로 활용하는 사례들이 대표적입니다. 제네시스의 고성능 브랜드 Magma나 오징어 게임의 타이틀 디자인에서도 한글의 조형적 특징을 활용한 시도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디자인은 한글을 모르는 사람에게도 독특한 이미지로 인식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 제네시스 마그마 레이싱(왼쪽) ©현대자동차 / 오징어 게임 국영문 타이틀 (오른쪽) ©Netflix >
반면 하이브리드 언어 로고는 서로 다른 언어 사용자들이 하나의 형태를 각자의 문자로 읽을 수 있도록 시도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한글은 자음과 모음을 조합하는 독특한 문자 체계입니다. 기하학적인 형태와 조합 원리를 영문 알파벳과 결합한다면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새로운 디자인이 탄생할 수도 있지 않을까요?
물론 쉽지 않은 작업일 것입니다. 서로 다른 두 문자 체계의 가독성을 확보하면서도 하나의 완성도 높은 형태로 만들어야 하니까요. 하지만 바로 그 어려움이 디자이너에게는 새로운 도전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글을 작성하면서 개인적으로 가장 크게 느낀 것은 우리가 가진 문자를 활용하는 방법이 생각보다 다양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영문 로고가 효율적이라는 이유로 한글을 처음부터 선택지에서 제외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반드시 한글과 영어를 결합해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익숙한 영문 로고에서 잠시 벗어나,
한글이 가진 조형적 가능성을 조금 더 적극적으로 탐구해보면 어떨까요?
언젠가 우리나라 디자이너가 개발한 한글과 영어의 하이브리드 언어 로고를 발견하고, 그 독창적인 발상과 완성도에 감탄할 수 있기를 기대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