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에는 유난히 ‘브랜딩’이라는 단어가 넓게 사용됩니다.
2000년대 초반, 제가 브랜딩 일을 시작할 당시만 해도 주변에 제 직업을 설명하려면 먼저 ‘브랜드’가 무엇인지부터 이야기해야 했고, 결국에는 “마케팅 비슷한 일이야”라고 얼버무리곤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러다 브랜드 개념이 점차 자리 잡으면서 한동안은 ‘브랜드 아이덴티티(Brand Identity)’라는 용어를 많이 사용했어요. 사실 브랜딩이라는 단어가 대중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아이러니하게도 “브랜딩이 더 큰 개념이냐, 마케팅이 더 큰 개념이냐”라는 논란과 함께, 이제는 브랜딩이라는 단어가 마케팅을 대체하듯 사용되고 있습니다. (최근 활성화된 용어이다 보니 좀 더 트렌디하고 있어 보인다는 이유도 있을 것 같습니다.)
업계의 고인물인 저에게 있어 브랜딩과 마케팅은 비교적 명확하게 구분됩니다.
하지만 지금은 업계에서 거의 모든 것을 브랜딩이란 단어로 퉁쳐버리는 현실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SNS 운영도 브랜딩, 팝업스토어도 브랜딩, 유튜브 콘텐츠도 브랜딩, 고객 응대도 브랜딩, 심지어 조직 문화까지 브랜딩이라고 부릅니다.
왜 이런 현상이 생겼을까요?
브랜드가 더 이상 네임과 로고만으로 경험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광고, 콘텐츠, 공간, 리뷰, 서비스 태도, 커뮤니케이션 방식까지 모두 합쳐 하나의 브랜드로 인식합니다. 그러다 보니 이제는 브랜드가 경험되는 거의 모든 과정이 브랜딩처럼 느껴지기 시작한 것이죠.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역할이 완전히 같아진 것은 아닙니다.
이번 글에서는 책을 예시로 좀 더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보고자 합니다.
1. 책은 어떻게 만들어지고 판매되는가?
한 권의 책이 세상에 나오기까지는 크게 세 단계가 존재합니다.
- 콘텐츠를 만드는 단계
- 그것을 브랜드로 인식시키는 단계
- 사람들에게 알리고 판매하는 단계
즉, 콘텐츠 제작 > 브랜딩 > 마케팅의 흐름으로 진행됩니다.
1-1. 콘텐츠를 제작하다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책의 콘텐츠입니다.
- 작가는 글을 쓰고
- 삽화가는 그림을 그리고
- 연구자는 자료를 조사하며
- 편집자는 원고를 다듬습니다.
즉, 책이라는 제품의 실체 자체를 만드는 단계입니다. 다른 분야로 비유하면 제조사가 제품을 만들고, 개발자가 서비스를 만드는 과정에 해당합니다.
이 영역은 브랜딩이라기보다 창작·기획·제작의 영역에 가깝습니다. 책의 내용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브랜드 역시 존재할 수 없기에 가장 먼저 선행되어야 할 단계입니다.
1-2. 책을 브랜딩하다 - "이 책은 어떤 존재인가?"
콘텐츠가 완성되면 그 다음 단계에서 브랜딩이 개입합니다.
- 어떤 제목을 붙일 것인가
- 어떤 표지를 사용할 것인가
- 어떤 분위기와 태도를 가질 것인가
- 누구를 위한 책처럼 보이게 할 것인가
- 작가를 어떤 캐릭터로 인식시킬 것인가
같은 내용의 책이라도 브랜딩에 따라 전혀 다른 책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학술서처럼 보일 수도 있고, 대중 교양서처럼 보일 수도 있으며, 감성 에세이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즉 브랜딩은 콘텐츠 자체를 만드는 일이라기보다, 그 콘텐츠가 어떤 존재로 인식될지를 설계하는 일에 가깝습니다.
1-3. 책을 마케팅하다 - "어떻게 발견되고 흥미를 갖게 할 것인가?"
브랜딩이 끝났다고 해서 책이 저절로 팔리지는 않습니다. 이제 사람들에게 알려야 합니다.
- 출간 소식을 알리고
- 광고를 집행하고
- 서점에 배치하고
- 리뷰를 유도하고
- 북토크를 열고
- SNS 콘텐츠를 운영합니다.
즉, 사람들이 책을 발견하고 관심을 갖도록 만드는 단계입니다.
전통적인 관점에서 마케팅은 “어떻게 더 많은 사람에게 도달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영역에 가까웠습니다. 브랜딩이 선택의 이유를 만드는 일이라면, 마케팅은 접점을 확대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 그런데 왜 브랜딩과 마케팅이 자주 혼동될까?
흥미로운 점은 소비자는 완전히 반대 순서로 브랜드를 경험한다는 것입니다.
소비자는 가장 먼저 마케팅을 접하게 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광고나 SNS, 이벤트를 통해 책을 처음 발견하고 흥미를 갖게 되죠.
그 다음 브랜딩을 경험합니다.
제목과 표지, 분위기와 메시지를 통해 책의 인상을 판단합니다. 왠지 읽어보고 싶다, 나와 잘 맞을 것 같다, 믿을 만해 보인다와 같은 감정이 형성되는 단계입니다. 즉, 흥미를 가졌던 책을 최종 선택하게 만드는 이유가 완성되는 것이죠.
그리고 마지막으로 콘텐츠를 경험합니다.
책의 문장, 구성, 정보의 깊이, 스토리의 완성도 등을 직접 읽어보며 브랜드의 실체를 확인하게 됩니다.
오늘날 브랜딩과 마케팅의 경계가 흐려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소비자는 가장 먼저 마케팅을 통해 브랜드를 접하게 되고, 그 순간 동시에 브랜드의 인상까지 함께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광고의 어조, SNS 콘텐츠의 분위기, 영상의 스타일, 팝업스토어의 연출 같은 요소들은 단순한 홍보를 넘어 브랜드 자체의 이미지로 인식됩니다. 즉, 마케팅 활동 자체가 브랜드 경험이 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에는 브랜드가 경험되는 거의 모든 과정이 브랜딩으로 불리게 된 것이죠.
3. 전통적 브랜딩 vs 오늘날의 브랜딩
과거에는 브랜드를 “식별”하는 것이 중요했다면, 지금은 브랜드를 “체감”하게 만드는 것이 중요해졌습니다.
예전에는 네임과 로고를 기억해야 브랜드가 인지된 것이었다면, 오늘날에는 전체적인 분위기와 느낌으로 브랜드를 인지합니다.
‘전설의 고향 가주세요’라는 손님의 말을 듣고 알아서 ‘예술의 전당’으로 데려다준 택시기사 이야기처럼, 정확한 네임과 선명한 로고는 더 이상 소비자에게 절대적인 요소가 아닙니다. (물론 브랜드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판매자 입장에서 여전히 매우 중요한 요소이지만요.)
그래서 오늘날의 브랜딩은 디자인 자체보다도 일관된 감각을 유지하는 능력에 가까워지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많은 브랜드들이 로고는 단순해지되, 시스템은 유연해지고, 브랜드 특유의 분위기와 태도가 더 중요시하는 현상과도 이어집니다.
4. 그렇다면 브랜딩과 마케팅은 구분할 수 없는 것일까?
실무에서는 완전히 분리하기 어렵습니다.
- 책 제목은 브랜딩이면서 동시에 마케팅 요소이기도 하고
- 표지 디자인은 브랜드 정체성이면서 클릭률에도 영향을 주며
- SNS 운영은 마케팅이지만 브랜드 태도를 형성하기도 합니다.
즉, 현대 브랜드에서는 두 영역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여기서부터입니다.
브랜딩이라는 개념이 지나치게 넓어지면서 실무 영역의 경계까지 흐려지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브랜드 프로젝트에서
- SNS 콘텐츠를 잠깐 운영했거나
- 광고 캠페인 일부를 제작했거나
- 영상 촬영을 담당했거나
- 팝업스토어를 운영했거나
- 패키지 일부를 디자인했음에도
“그 브랜드 내가 만들었어”라고 이야기하는 경우가 매우 많아졌습니다. 수많은 “자칭” 브랜딩 전문가가 탄생한 배경이기도 하죠.
물론 현대 브랜드는 다양한 경험 요소로 구성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 참여한 모든 사람의 기여 역시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 제품과 서비스를 기획하고 만드는 일
- 브랜드 전략을 설계하는 일
- 네임을 만드는 일
- 로고를 디자인하는 일
- 디자인 시스템을 구축하는 일
- 마케팅을 운영하는 일
이 모두 동일한 전문성은 아닙니다.
오히려 오늘날에는 브랜딩이라는 단어가 지나치게 넓어지면서 전문 영역에 대한 이해가 더 흐려지는 경우도 많습니다. 또 모든 것을 브랜딩이라고 부르다 보니, 마치 한 사람이 모든 영역을 다 이해하고 수행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물론 소규모 프로젝트에서는 여러 역할을 동시에 수행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각 영역마다 완전히 다른 사고 방식과 전문성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브랜딩의 개념은 확장되었지만, 브랜딩 전문가라는 개념은 오히려 더 좁고 신중하게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브랜드는 이제 수많은 경험 요소가 결합된 복합 구조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즉 지금은 한 사람이 모든 것을 다 소화해내는 시대라기보다, 각자의 전문성을 가진 사람들이 함께 깊이 있게 협업해야 하는 시대에 가깝습니다.
어쩌면 진짜 전문가는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어디까지 책임질 수 있는지를 정확히 아는 사람인지도 모릅니다.
마무리하며
하나의 책은 누군가 내용을 만들고, 누군가 그것을 브랜드로 인식시키며, 누군가 사람들에게 알리고 확산시키는 과정을 통해 완성됩니다.
브랜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브랜드는 단 하나의 활동이 아니라, 콘텐츠 제작·브랜딩·마케팅이라는 서로 다른 역할이 연결되어 만들어지는 결과물에 가깝습니다.
오늘날 브랜드는 더 이상 네임과 로고만으로 기억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콘텐츠, 공간, 서비스, 말투, 운영 방식까지 포함한 경험 전체를 통해 브랜드를 인식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의 브랜딩은 단순한 네임과 로고 디자인을 넘어 브랜드 경험 전반을 다루는 개념으로 확장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업무를 브랜딩이라는 단어 하나로 부르는 것이 적절한 것은 아닙니다. 브랜드 전략, 네이밍, 디자인, 콘텐츠 제작, 마케팅 운영 등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지만 동시에 서로 다른 전문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즉, 브랜딩의 개념은 오늘날의 방식으로 확장되었지만, 업무 영역에서는 오히려 전통적인 구분으로 소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야 누가 어떤 역할을 담당했는지, 어디까지 기여했는지, 어떤 전문성을 가진 사람인지를 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브랜딩이라는 단어를 더 넓게 사용하는 일이 아니라, 더 정확하게 사용하는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