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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랜딩 기획자란?

이번 글은 브랜드비 대표이자 에디터인 저의 경험과 생각을 담았어요.

참고로 저는 브랜딩 업계에서도 비교적 독특한 경력을 갖고 있고, 일반화하기는 어렵다는 점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어떻게 보면 저만의 특장점을 자랑하는 글이 될 수도 있는데요, 궁극적으로는 브랜드비가 플랫폼으로서 지향하는 방향과도 맞닿아 있다고 생각해요.




먼저 제 이야기에서 시작할게요.

저는 과학고를 나와 KAIST에서 산업디자인을 전공했어요. 하지만 교수님 소개로 입사한 브랜딩 회사에서 '네이밍'이라는 업무가 있다는 걸 처음 알게 되었고, 흥미를 갖게 되었죠. 브랜드 네이밍 자체도 재미있었지만, 저의 이과 성향 때문인지 브랜드 전략과 구조에도 점점 더 관심이 생기더라고요.

이후 자연스럽게 브랜딩 기획 전반으로 역할을 확장하게 되었고, 지금은 브랜드의 언어, 시각, 구조 사이를 연결하는 기획자로 일하고 있어요.

 



브랜딩 프로젝트에서 기획자의 기여는 종종 보이지 않습니다.

네이미스트는 이름을 만들고, 디자이너는 로고나 패키지 등 시각적 결과물을 만들죠.

그런데 기획자는 무엇을 만든다고 할 수 있을까요?


기획자로서의 저는 결과물을 만드는 사람은 아니었어요.

하지만 프로젝트가 작동하게 만드는 ‘구조’를 설계해왔다고 할 수 있죠.

지금부터 제가 직접 경험한 사례들을 통해, 브랜딩 기획자가 실무에서 실제로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이야기해 보려고 해요.




1. 브랜드뿐 아니라 보고하는 방식도 디자인되어야 한다


갓 네이밍 업무를 시작했을 때, 제가 낸 아이디어가 바로 채택되진 않았어요. 초짜니까 당연했죠.

그런데 참여했던 한 프로젝트가 여러 번의 네임 시안 보고에도 전혀 진전이 없었어요.

이를 답답하게 지켜보던 저는, 네임 시안들이 어떻게 구성되고 보여져야 설득력 있게 작동할 수 있을지 고민했죠.

디자인과를 나왔기에 타이포그래피와 시각적 무드를 활용해 보고서를 구성하는 건 자신 있었거든요.


회사에서 이 생초보의 보고서를 거의 수정 없이 그대로 발표한 것은, 지지부진했던 프로젝트의 돌파구로 삼고 싶었던 결정이 아니었을까 추측해요. (물론 저는 제 보고서가 무척 훌륭했기 때문이라고 믿습니다!)


놀랍게도 클라이언트는 그 보고서를 보고 매우 만족하며 최종 네임을 선택했어요.

비록 저는 결과물을 만들지 않았지만, 그 결과물이 ‘브랜드’로 작동할 수 있도록 상상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든 것이죠.




2. 공허한 네임을 데코레이션만으로 설득할 수 있을까?


브랜딩 초보 시절에는 모든 프로젝트를 100% 이해하기 어렵죠. ‘브랜드’라는 타이틀 아래 정말 다양한 분야를 다루니까요.

신입의 아이디어는 참신하지만, 종종 디렉터의 방향성과 어긋나기도 하고요.

 

어느 날, 또 역시나 진행하고 있는 네이밍 프로젝트가 꽉 막혀 있었어요. 지지부진한 의사결정 속에 네임 후보안들이 양산형으로 ‘찍혀’ 나오고 있었고, 전략이나 방향성은 사라진지 오래였죠. 수많은 후보안들이 다 거기서 거기처럼 느껴졌어요.

그런데 이전에 제가 낸 시각적 구성의 성공 때문인지, 팀에서는 또다시 저에게 그 수많은 후보안들을 ‘좋아 보이도록’ 만들어 달라고 했어요.

 

그때 저는 무척 큰 심리적 갈등을 겪었어요.

브랜드의 논리와 핵심을 만들고 그것를 언어로 표현하는 사람이 아니라, 단지 보기 좋게 꾸며주는 ‘디자인 도구’처럼 느껴졌거든요.

설득력 없는 네임을 그럴듯하게 포장해서 '팔 수는' 있겠지만, 그런 브랜드가 과연 지속가능할까? 라는 의문이 들었죠.


지금은 네임 후보안을 시각적으로 포장하지 않아요.

비록 제가 그 ‘포장’의 도화선 역할을 했었던 사람이지만, 경험이 쌓인 지금은 브랜드 네이밍에 대한 저만의 철학이 생겼기 때문이예요.

좋은 브랜드 네임이라면 그 자체 - 철자와 음절만으로도 충분히 설득력이 있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기획자로서는 설득력 있는 구조와 메시지를 차별화된 방식으로 설계하려고 여러모로 시도하고 있습니다.

(이미 눈치채셨을 수도 있는데요, 저는 기존에 없던 새로운 시도를 해 보는 것을 좋아합니다. 매번 똑같은 방식으로 일하면 재미가 없더라고요.)




3. 설명을 바꾸자, 비로소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이번에는 기획자로 일하면서의 경험이에요.

굉장히 중요한 CI 디자인 프로젝트 후반에 투입된 적이 있었어요.

몇 차례 디자인 보고가 있었지만, 클라이언트는 의사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죠.

 

제가 보기엔 시안들 모두 장점이 있었어요. 다만 너무 불친절했죠.

아름다운 그래픽이 나열되어 있었지만,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파악하기 어려웠어요.

로고 디자인은 작가의 의도를 유추하며 감상하는 예술 작품이 아니라 브랜드 커뮤니케이션의 시작점인데 말이에요.

 

그래서 저는 각 시안의 컨셉과 스토리를 간결하게 설명하는 텍스트 페이지를 추가했어요.

그 결과, 클라이언트는 바로 결정을 내렸죠.

 

이 프로젝트에서 저는 처음부터 참여하지 않았고, 브랜드 전략이나 디자인 방향성에도 개입하지 않았어요.

단지 디자인이 선택될 수 있도록 돕는 구조를 설계했을 뿐이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역할이 있었기에 프로젝트는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죠.

그 기여도를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요?




4. 디렉터는 아니었지만, 프로젝트를 구출해냈다


이번 사례는 가장 힘들었던 프로젝트 중 하나예요.

신규 브랜드의 아이덴티티 플랫폼과 로고 디자인을 개발하는 프로젝트였는데, 클라이언트는 글로벌 스탠다드에 맞춘 전략을 원했고, 우리는 해외 에이전시와 협업하게 되었어요.

 

저는 초반부터 불안감을 느꼈어요. 한국 클라이언트와 해외 에이전시가 '브랜드 플랫폼' 개발 과정과 산출물을 서로 다르게 인식하고 있었거든요.

대표님께 조심스레 이견을 말씀드렸지만, “너는 디렉터가 아니니까 관여하지 마”라는 말을 들었죠.

 

결국 불안은 현실이 되었고, 첫 번째 결과물은 클라이언트에게 실망만 안겨줬어요.

우리는 프로젝트 전체를 잃을 위기에 처했고, 본업인 디자인 단계로 넘어가지도 못했어요.

 

저는 브랜드 플랫폼을 다시 재해석하고, 클라이언트의 관점에 맞춰 내용을 조정했어요.

해외 에이전시와 소통하고, 한국어 자료를 번역하고, 모든 일정을 조율했죠.

그 과정에서 팀원은 업무 과다를 이유로 퇴사했고(퇴사를 문자로 통보 받았던 첫 경험이었습니다...), 저는 한 달 넘게 야근하며 구조를 다시 설계했어요.


결과적으로 프로젝트는 성공적으로 회복되었고, 디자인 개발도 이어질 수 있었죠.

 

이 프로젝트에서 저는 디렉터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프로젝트가 무너지지 않도록 중간에서 구조를 만들고, 기대치를 정리하고, 사람과 사람 사이를 연결하는 역할을 했어요.

그건 타이틀로는 명명되지 않는 기획자의 리더십이라고 생각해요.




5. 공간을 미사여구가 아닌 브랜드로서 정의하다


저는 공간 기획 프로젝트에도 여러 번 참여한 경험이 있는데요, 그 중 하나가 바로 신생 전자제품 브랜드의 CS센터 인테리어 디자인 프로젝트였어요. 이 공간은 단순한 서비스센터가 아니라, 강남 번화가에 위치해 브랜드의 이미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플래그십 스토어와 같은 중요한 고객 접점이었어요.


저는 이 공간을 단순한 'Customer Service'가 아닌, 'Care&Share'라는 브랜드 개념으로 재정의했어요.

제품을 ‘케어하는’ 공간을 넘어, 관련된 다양한 정보와 경험을 ‘나누는’ 공간이라는 개념이었죠.

 

하지만 중간 클라이언트였던 광고대행사 담당자는 이 컨셉을 이해하지 못했어요.

‘멋지고 있어 보이는 말’로 바꾸라고 했죠. 예를 들면 “공감각적 심상을 비정형적 형태로 구현한 혁신적 공간” 같은...

(이 표현이 바로 이해가 되신다면 예술 분야 쪽으로 확장해도 될 것 같아요.)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본질과 무관한 포장은 지양하고 있어요.

저의 완강한 거부에, 결국 중간 클라이언트가 직접 컨셉을 작성해서 보고를 했는데요, 번번이 퇴짜를 맞았고 마지못해 제가 제안한 컨셉으로 다시 보고를 진행했어요.

그동안의 퇴짜가 무색하게도, 최종 클라이언트는 이 컨셉을 한 번에 통과시켰습니다.

하지만 담당자는 끝까지 제 컨셉이 통과된 이유를 모르겠다고 하더군요.

 

이 경험은 기획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말을 잘 꾸미는 능력’이 아니라, 브랜드의 본질을 읽고 그것을 단단하게 정리해내는 감각이라는 걸 다시금 확신하게 해주었어요.




브랜딩 기획자는 결과물을 만들지 않는다

하지만 결과가 작동하게 만드는 구조를 설계한다


아이디어가 실행되는 조건을 만들고, 언어와 시각의 틈을 메우며, 전략이 디자인으로 번역되게 하는 일.

그 모든 일을 ‘디렉터’가 아니어도, ‘결정권자’가 아니어도 수행하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브랜딩 기획자라고 생각합니다.

 

기획자의 기여는 보이지 않지만, 명백합니다.

 

그리고 지금, 브랜딩 프로젝트에는 ‘진짜 기획자’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과거 브랜딩 에이전시의 기획자들은 클라이언트와 연락하고 일정을 조율하는 단순 매니지먼트 역할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았어요. 그래서 번듯한 외모의 ‘얼굴마담’이면 충분했죠.

대형 에이전시에서는 전략 디렉터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에 묻혀 존재감이 사라지고, 소형 에이전시에서는 인건비 부담 때문에 기획자의 역할을 디자이너가 겸하는 경우도 흔하죠.

 

하지만 브랜딩은 단지 예쁘게 만드는 것이나, 철학만 정리하는 것으로 한정되지 않습니다.

브랜드를 ‘작동하게 만드는 구조’를 설계할 수 있는 사람, 바로 그런 브랜딩 기획자가 있어야 브랜드가 흔들리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앞으로는 각자의 전문성을 가진 사람들이 유기적으로 협업하는 구조가 더 많이 만들어졌으면 해요.

전략가는 브랜드의 위치와 역할을, 네이미스트는 브랜드의 이름을, 디자이너는 시각 언어를, 그리고 브랜딩 기획자는 이 모든 흐름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도록 중심을 잡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중심이 잘 잡힌 프로젝트일수록 결과도 더 단단해집니다.

그리고 브랜드비는 그 중심을 설계할 수 있는 기획자입니다.


진정한 브랜딩 기획이 필요하시다면, 브랜드비에 의뢰해 주세요.

2025 JU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