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적으로 브랜드 아이덴티티는 하나의 고정된 로고로 대표되었습니다. 기업은 브랜드 매뉴얼을 만들고, 로고의 형태와 색상, 여백까지 엄격하게 규정하며 일관성을 유지해 왔죠. 오랫동안 이러한 일관성은 강력한 브랜드를 만드는 가장 중요한 원칙으로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디지털 환경이 확대되고 브랜드가 소비자와 만나는 접점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하나의 고정된 로고만으로는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전달하기 어려워졌습니다. 모바일 화면부터 대형 미디어파사드, 인터랙티브 웹사이트, AR·VR 환경까지 매체마다 요구되는 표현 방식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등장한 개념이 바로 다이나믹 아이덴티티(Dynamic Identity)입니다.
다이나믹 아이덴티티는 단순히 로고가 움직이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의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일정한 규칙 아래 다양한 모습으로 표현하도록 설계한 시스템입니다. 중요한 것은 '변화' 자체가 아니라, 변화를 통제하는 규칙입니다.
다이나믹 아이덴티티를 정의한 좋은 글이 있어 아래 링크로 공유합니다.
참고: What are Dynamic Brand Identities? by Patrik Hübner
또 다이나믹 아이덴티티와 함께 자주 언급되는 개념이 플렉서블 아이덴티티(Flexible Identity)입니다. 두 용어는 혼용되는 경우가 많지만 엄밀히 말하면 같은 의미는 아닙니다.
플렉서블 아이덴티티는 다양한 표현을 허용하는 유연성을 강조하는 개념이라면, 다이나믹 아이덴티티는 시간, 환경, 사용자 등의 조건에 따라 시스템적으로 변화하도록 설계된 능동성을 강조하는 개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즉, 모든 다이나믹 아이덴티티는 플렉서블 아이덴티티에 포함될 수 있지만, 모든 플렉서블 아이덴티티가 다이나믹 아이덴티티인 것은 아닙니다.
참고: 브랜드비의 트렌드 키워드에서는 분류 상 편의를 위해 플렉서블 아이덴티티를 다이나믹 아이덴티티로 통합했습니다.
그렇다면 브랜드는 무엇을 변화시키고, 무엇을 기준으로 움직일까요?
다이나믹 아이덴티티의 구현 방식을 크게 두 가지 기준으로 나눠봤습니다.
하나는 브랜드가 스스로 정한 규칙에 따라 변화하는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시간이나 환경, 사용자의 행동처럼 외부 조건에 반응하여 변화하는 방식입니다.
1. 브랜드 주도형 변화 (Self-driven Dynamics)
1-1. 프레임형 심볼 (Frame) : 고정된 프레임 안에서 그래픽이 변화하는 방식
가장 대표적인 다이나믹 아이덴티티 유형입니다.
심볼의 외곽 형태는 그대로 유지한 채 내부 그래픽, 컬러, 패턴, 이미지 등이 다양하게 변화합니다.
< 다이나믹 아이덴티티의 대표 사례로 꼽히는 City of Melbourne>
<학과 별 특징을 다양한 I 심볼로 표현한 Imperial College London>
<음악 장르에 따라 Music을 대표하는 중간 이니셜 M을 변형한 Ecole Des Musiques Actuelles>
1-2. 가변형 로고 (Form) : 로고 자체의 형태가 변화하는 방식
프레임형과 달리 이번에는 로고의 형태 자체가 계속 달라집니다.
다만 무작위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생성 규칙이나 조형 원리를 공유합니다.
<다이나믹 아이덴티티의 대표 사례로 꼽히는 MIT MEDIA LAB (2011)>
<변화하는 Y 심볼로 공간 설계를 표현한 YLLW>
<4개의 사각형을 자유롭게 조합하여 크리에이티브 공간을 표현한 PLOT>
1-3. 3D 로고 (Spatial) : 3차원 공간으로 확장된 아이덴티티
3D 구현 기술의 대중화로 최근 증가하고 있는 유형입니다.
2차원 로고가 아닌 3차원 오브젝트 자체를 브랜드 아이덴티티로 활용합니다.
*각 로고의 특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브랜드 및 에이전시의 웹사이트를 직접 확인해보는 것을 추천합니다.
<3D 글자체로 3D 프린팅 원단 기술을 표현한 Variloom>
<3D 그래픽 스튜디오의 아이덴티티를 3D 심볼로 표현한 Bolder>
<브랜드의 이니셜을 3D로 구현한 3D건축 환경 그래픽 전문 기업 Hyes Davidson>
1-4. 가변형 서체 (Typography) : 글자 자체가 변화하는 방식
가변 글꼴(Variable Font) 기술과 크리에이티브 코딩의 발전으로 서체의 굵기, 폭, 기울기, 곡률 등을 자유롭게 조절하는 사례가 증가하고 있습니다.
*크리에이티브 코딩: 기능적인 소프트웨어 개발을 넘어, 예술적 표현과 시각적·상호작용적 결과물을 만드는 데 프로그래밍을 활용하는 분야
<크리에이티브 코딩으로 워드마크가 다이나믹하게 변화하는 Tokyo Dome City>
<음악에 반응하는 이미지를 표현한 London Sinfonietta>
<수면 아래에서 위로 떠오르는 고래의 모습을 표현한 가변형 서체 The Whale>
2. 반응형 변화 (Reactive Dynamics)
2-1. 시간의 흐름 (Time-driven)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아이덴티티입니다. 모션 그래픽을 활용한 대부분의 다이나믹 아이덴티티가 여기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만 단순 애니메이션을 추가한 아닌 움직임을 통해 고유한 브랜드 정체성을 표현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트램의 움직임을 표현한 Tramhuis>
<회전하는 구형(Globe)으로 즐거움을 표현한 호주의 테마파크 Fun Fields>
<시간의 흐름에 따른 그림자 변화를 표현한 Paddington Central>
2-2. 외부 환경 (Environment-driven)
외부 환경이나 데이터를 반영해 변화하는 유형입니다.
날씨, 위치, 계절, 실시간 데이터 등에 따라 로고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실시간 기상 데이터를 바탕으로 형태와 색상이 변하는 Nordkyn>
<빛에 반응하여 글자의 두께가 변화하는 Deltalight>
2-3. 사용자 반응 (User-driven)
사용자의 행동이 브랜드를 변화시킵니다. 마우스로 회전하거나 터치하고, 직접 커스터마이징하거나 참여하는 순간 브랜드가 완성됩니다.
브랜드는 더 이상 일방적으로 보여주는 대상이 아니라, 사용자가 함께 경험하는 시스템이 됩니다.
<사용자 반응에 따라 다양한 서체로 표현되는 Paradiso Institute>
<사용자 마음대로 원하는 로고를 만들 수 있는 NOT Wieden+Kennedy>
2-4. 시점 변화 (Perspective-driven)
사용자의 시점에 따라 다르게 인식되는 유형입니다.
앞서 소개한 3D 로고(1-3)나 사용자 반응형(2-3)과 밀접한 관련이 있어 명확히 구분하기는 어렵습니다. 두 개의 개념이 복합된, 3D 공간 위에 사용자의 상호작용이 더해진 형태로 이해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공간에 투사한 이름과 슬로건을 표현한 Spatial Festival>
<아나모픽(Anamorphic) 효과로 사이버 보안을 표현한 Tenable>
다양한 형태의 로고가 곧 다이나믹 아이덴티티는 아니다
최근에는 하나의 고정된 로고 대신 다양한 형태의 로고를 사용하는 브랜드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아이돌 그룹 '뉴진스'는 활동마다 전혀 다른 로고를 선보이며 큰 화제를 모았습니다. 넓은 의미에서는 이러한 접근을 플렉서블 아이덴티티의 한 사례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를 곧바로 다이나믹 아이덴티티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정형화되지 않은 다양한 로고를 갖고 있는 뉴진스>
앞에서 살펴본 다이나믹 아이덴티티의 핵심은 변화 자체가 아니라, 변화를 만들어내는 하나의 규칙과 시스템입니다. 반면 뉴진스의 로고는 하나의 형태가 변화하는 방식이라기보다, 애초에 하나의 정형화된 로고를 브랜드의 중심 자산으로 두지 않는 전략에 더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즉, '다양한 로고를 사용한다'는 공통점은 있지만 접근 방식은 다이나믹 아이덴티티와는 조금 다른 개념입니다.
이 부분은 최근 등장하고 있는 새로운 브랜드 아이덴티티 흐름과도 연결되는 이야기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추후 별도의 글에서 조금 더 자세히 다뤄보겠습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움직임이나 변화가 아니다, 아이덴티티다
다이나믹 아이덴티티를 이야기할 때 많은 사람들은 '움직인다', '형태를 바꾼다'는 점에 주목합니다.
하지만 브랜드 관점에서 중요한 것은 움직임이나 변화 자체가 아닙니다.
먼저 결정해야 하는 것은 무엇을 자유롭게 변화시킬 것인지, 무엇만큼은 끝까지 유지할 것인지입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무엇을 표현하고 전달할 것인지입니다. 어떤 브랜드는 프레임을 고정한 채 그래픽만 바꾸고, 어떤 브랜드는 하나의 규칙 아래 형태를 변화시킵니다. 또 어떤 브랜드는 사용자와 환경까지 브랜드 경험의 일부로 끌어들입니다.
결국 다이나믹 아이덴티티는 하나의 로고를 여러 개로 만드는 기술이 아닙니다.
다양한 환경과 변화 속에서도 하나의 브랜드로 인식되도록 만드는 설계 방식입니다.
디지털 환경과 기술의 발전, 그리고 생성형 AI의 등장으로 브랜드가 소비자와 만나는 접점은 앞으로도 더욱 다양해질 것입니다. 이제 브랜드 경쟁력은 하나의 완벽한 로고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변화 속에서도 브랜드다움을 유지할 수 있는 시스템을 설계하는 능력에 달려 있습니다.
PS. 그리고 어쩌면 앞으로의 브랜드는 '어떻게 로고를 변화시킬 것인가'보다 '로고를 반드시 브랜드의 중심에 두어야 하는가'를 고민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이 이야기는 다음 글에서 이어가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