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ure image
Probably Serif by Taxi Studio

브랜드 전용서체 개발은 이제 흔한 브랜딩 방법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전용서체 개발은 생각보다 어려운 작업입니다. 브랜드만의 개성을 강하게 담을수록 가독성과 활용성이 떨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읽기 쉽고 사용하기 편한 서체를 만들다 보면 브랜드만의 특징이 희미해질 수 있죠. 그래서 많은 전용서체 프로젝트는 개성과 가독성 사이에서 균형을 찾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최근 Carlsberg가 공개한 전용서체 Probably Serif는 조금 다른 이유로 흥미로운 사례입니다. 이 서체는 브랜드의 개성을 표현하는 수준을 넘어, 브랜드 네임과 로고를 대신할 수 있는 새로운 브랜드 자산으로 개발되었기 때문입니다.






< Carlsberg의 Probably 광고 캠페인 @ UEFA EURO 2016 >


주류 브랜드가 직면한 광고 규제


주류 산업은 국가별로 광고 규제가 매우 강한 업종 중 하나입니다.

특히 프랑스의 에뱅법(Loi Évin)은 주류 광고가 전달할 수 있는 내용을 엄격하게 제한하고 있습니다. 제품명, 원산지, 제조 방법 등 객관적인 정보는 허용되지만, 라이프스타일이나 감성적 메시지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기는 어렵습니다. 이는 단순히 광고 문구의 문제가 아닙니다. 브랜드가 소비자와 만나는 방식 자체가 제한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Carlsberg는 프랑스에서 열린 UEFA EURO 2016의 공식 스폰서였지만, 광고 규제 때문에 평소처럼 브랜드를 노출하기 어려웠습니다.


흥미롭게도 이때 Carlsberg는 브랜드명 대신 “Probably”라는 단어를 전면에 내세웠습니다.

수십 년 동안 사용해 온 슬로건 “Probably the best beer in the world”의 일부만을 노출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은 그것이 Carlsberg임을 알아보았습니다. 이는 단순히 슬로건이 소비자에게 각인된 결과라기보다, 슬로건에 적용된 서체 역시 Carlsberg를 연상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Carlsberg의 고민은 이때부터 시작되었을 것입니다.

"만약 브랜드 네임과 로고를 노출할 수 없는 상황이 계속된다면, 브랜드는 무엇으로 소비자와 연결될 수 있을까?"




< Carlsberg 로고 (2018~) >



로고를 대신할 수 있는 서체


Carlsberg는 이 문제를 전용서체로 해결하고자 했습니다.


Probably Serif는 Carlsberg의 글로벌 디자인 파트너 Taxi Studio가 개발한 전용서체입니다.

이 서체는 1904년부터 사용해 온 Carlsberg 로고의 특징을 분석하는 것에서 출발했습니다. 로고에 담긴 유기적인 곡선과 독특한 세리프 형태, 풍부한 표현력을 지닌 합자(Ligature) 구조를 추출해 하나의 서체 시스템으로 확장한 것입니다.



서체의 디자인적 완성도나 아름다움에 대한 찬사는 생략하겠습니다. (직접 보면 다 느낄 수 있으니까요!) 브랜드비가 특히 주목한 점은 그 역할입니다.

Probably Serif는 일반적인 전용서체처럼 일관성 있는 브랜드 커뮤니케이션을 목적으로 개발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로고가 등장하지 않는 환경에서도 Carlsberg를 인식하게 만들기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 키릴문자로 표현된 러시아의 지명, 소피아 >


이를 위해 Taxi Studio는 단순히 알파벳 몇 글자를 디자인하는 수준을 넘어, Carlsberg가 활동하는 글로벌 시장 전반에서 사용할 수 있는 서체 체계를 구축했습니다. Probably Serif는 서유럽 언어권을 위한 라틴 문자(Latin)뿐 아니라 동유럽과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사용되는 키릴 문자(Cyrillic)까지 함께 개발되었습니다. 글자 체계가 다른 언어에서도 동일한 브랜드 경험을 제공하기 위함입니다.

결국 Probably Serif는 여러 언어와 시장에서 브랜드를 대신해 기능하는 글로벌 브랜드 자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독성보다 중요한 것, 식별성


전용서체를 평가할 때 우리는 흔히 가독성과 활용성을 먼저 이야기합니다.


실제로 대부분의 브랜드 전용서체는 개성과 가독성 사이에서 균형을 찾기 위해 노력합니다. 어떤 브랜드는 디스플레이용 서체와 본문용 서체를 분리해 개발하기도 하고, 어떤 브랜드는 지속적인 리뉴얼을 통해 활용성을 개선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Probably Serif는 조금 다른 질문을 던집니다.


전용서체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많은 사람이 사용하게 만드는 것일까요,

아니면 브랜드를 연상하고 기억하게 만드는 것일까요?


Probably Serif는 후자에 가까운 선택을 했습니다. 만약 가독성만을 고려했다면 로고의 독특한 특징은 상당 부분 제거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서체는 오히려 로고의 개성을 적극적으로 유지했습니다. 효율적인 정보 전달과 기능성보다 브랜드 식별을 우선했기 때문입니다.


최근 국내에서 발표되는 많은 브랜드 전용서체는 가독성과 활용성에 더욱 무게를 두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는 브랜드 이미지를 각인시키기보다 더 많은 사람이 폰트를 다운로드하고 사용하도록 만드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많은 사람이 다운로드해 사용하더라도, 정작 그 서체와 브랜드를 연결 짓지 못한다면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단순히 폰트 이름 앞에 브랜드 네임이 붙어 있는 것만으로 브랜딩이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을까요?


브랜드 자산의 가장 기본적인 핵심은 네임과 로고입니다.

하지만 가장 강력한 브랜드는 네임과 로고 없이도 알아볼 수 있는 브랜드일 것입니다.

Probably Serif는 전용서체가 그 역할을 담당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2026 JU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