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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nnersbury Park & Museum by Wiedemann Lampe

*All Images © Wiedemann Lampe




플렉서블 아이덴티티(Flexible Identity)를 이야기하면 흔히 변형 버전이 많을수록 좋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다양한 사업과 서비스마다 각각의 버전을 만들고, 상황에 따라 무한히 확장하는 것이 플렉서블 아이덴티티의 장점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요?

런던의 복합 문화공간 Gunnersbury Park & Museum은 조금 다른 선택을 했습니다. 공원과 박물관, 스포츠 시설, 정원, 공연장, 웨딩 베뉴까지 다양한 기능을 갖추고 있지만, 아이덴티티는 오직 두 개의 심볼만 남겼습니다.


유연하게 변화하는 플렉서블 아이덴티티일지라도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은 버전을 만들 수 있느냐가 아니라,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덜어낼 것인가입니다.






<Gunnersbury Park & Museum 이전 로고 (발표 년도 미상)>


브랜딩보다 먼저 통합되어야 하는 것은 운영이다


런던 서부에 위치한 Gunnersbury Park & Museum은 서울숲의 약 두 배에 달하는 72헥타르 규모의 영국 Grade II 지정 역사공원입니다. 한때 유럽 금융 명문인 로스차일드(Rothschild) 가문의 저택이었던 이곳은 1926년 시민공원으로 개방된 이후 올해로 100주년을 맞았습니다. 현재는 연간 100만 명 이상이 찾는 런던의 대표적인 공공 공간으로, 공원과 박물관은 물론 스포츠 시설과 공연장, 웨딩 베뉴, 커뮤니티 프로그램까지 다양한 기능을 품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처럼 풍부한 역사와 다양한 콘텐츠를 갖춘 공간임에도 사람들에게 Gunnersbury는 그저 ‘넓은 공원’ 정도로만 인식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문제는 브랜드보다 운영에 있었습니다.

Gunnersbury는 런던의 Ealing과 Hounslow 두 개 자치구가 공동으로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공원과 박물관을 비롯한 다양한 시설을 운영해야 했지만 관리 체계는 복잡했고, 공간 전체를 하나의 비전 아래 일관되게 운영하기도 쉽지 않았습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2015년 Gunnersbury Estate (2026) CIC (*회사 이름에 100주년이 되는 년도를 표기한 것이 인상적입니다)를 설립하고, 이후 공원과 박물관의 운영을 하나의 조직으로 통합하는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최근에는 Gunnersbury Museum and Park Development Trust를 중심으로 운영 체계를 재편하며 보존과 운영, 기금 조성, 브랜드 전략까지 하나의 방향 아래 추진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하지만 운영이 하나가 되었다고 해서 방문객의 경험까지 달라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음 100년을 준비하기 위해 Gunnersbury에 필요했던 것은 새로운 시설이 아니라, 이 공간이 가진 가치를 사람들이 다시 발견하도록 만드는 브랜드 경험이었습니다.






<Gunnersbury Park & Museum 새로운 로고 (2026~)>


숨겨진 이야기를 찾아내어 풍성한 삶을 직조하다


Wiedemann Lampe는 Gunnersbury의 가장 큰 문제가 이야기는 이미 존재했지만 제대로 전달되지 않고 있었던 것이라고 말합니다.

공원은 이미 잘 알려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정작 공원 안에 박물관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방문객이 많았습니다. 넓은 부지 탓에 박물관을 발견하지 못하고 돌아가는 경우도 있었고, 로스차일드 가문의 저택이라는 역사적 가치 역시 공원의 존재감에 가려 충분히 전달되지 못했습니다.





Wiedemann Lampe는 먼저 Gunnersbury의 존재 이유를 다시 정의했습니다. 이를 하나의 브랜드 문장으로 정리한 것이 바로 ‘Life’s Rich Tapestry’입니다. 태피스트리는 수많은 색실이 서로 얽혀 하나의 작품을 완성합니다. Gunnersbury 역시 다양한 사람과 경험, 역사와 문화가 함께 모여 하나의 장소와 삶을 만들어 간다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전략은 시각 아이덴티티에도 이어집니다.





기존에는 하나의 로고가 모든 커뮤니케이션을 담당했습니다. 반면 새로운 아이덴티티는 공원을 상징하는 나무 심볼과 박물관을 상징하는 건물 심볼을 각각 독립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설계했습니다. 그리고 전체 공간을 대표할 때는 두 심볼을 나란히 배치해 하나의 로고를 완성합니다.


이는 단순히 로고를 둘로 나눈 것이 아닙니다. 공원의 존재감에 가려졌던 박물관을 독립적인 목적지로 인식시키는 동시에, 필요할 때는 다시 하나의 Gunnersbury로 연결하는 구조입니다. 운영은 하나지만, 방문객에게는 상황에 따라 가장 적절한 얼굴을 보여주는 전략인 셈입니다.





브랜드 경험은 로고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새로운 Wayfinding은 단순히 길을 알려주는 시스템이 아닙니다. 서로 떨어져 있던 공간을 하나의 경험으로 연결하고, 숨어 있던 장소를 발견하게 만드는 장치입니다. 그래서 Wiedemann Lampe는 Wayfinding을 스토리텔링이라고 설명합니다. 길을 찾는 과정 자체가 Gunnersbury의 다양한 이야기를 발견하는 여정이 되도록 설계한 것입니다.





형태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된다, 전략의 결과여야 한다


이번 사례를 보며 흥미로웠던 점은 플렉서블 아이덴티티를 바라보는 방식입니다.

보통 플렉서블 아이덴티티는 하나의 심볼을 중심으로 다양한 버전을 만들어 상황에 따라 확장합니다. 하지만 Gunnersbury는 조금 다른 접근을 선택했습니다.


이 공간에는 공원과 박물관뿐 아니라 스포츠 시설과 정원, 공연장, 웨딩 베뉴, 커뮤니티 공간 등 다양한 기능이 있습니다. 만약 모든 기능을 독립적인 아이덴티티로 표현했다면 스포츠 심볼과 정원 심볼, 웨딩 심볼까지 끝없이 늘어났을 것입니다.


하지만 Gunnersbury는 공원과 박물관, 단 두 개의 심볼만 선택했습니다. 공원은 Gunnersbury를 대표하는 공간이고, 박물관은 그동안 충분히 드러나지 못했던 핵심 자산입니다. 다양한 경험은 이 두 개의 축 안에서 자연스럽게 연결되도록 설계했습니다. 모두를 보여주려 하기보다, 무엇을 대표로 남길 것인가를 먼저 결정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 사례는 플렉서블 아이덴티티를 단순히 ‘유연하게 변하는 로고’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브랜드의 구조를 얼마나 명확하게 정의하고, 그 구조를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형태를 선택하는가입니다.


플렉서블 아이덴티티의 가치는 무한한 확장에만 있지 않습니다. 브랜드의 본질을 가장 잘 설명하는 요소를 남기고, 나머지는 과감히 덜어내는 전략적 선택과 집중이 필요합니다.

2026 AU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