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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자가 브랜드를 품에서 떠나보내야 할 때

브랜딩이라는 단어가 대중화되면서 정의하는 영역이 넓어지고, 브랜딩 업에 종사하는 사람도 다양해졌어요.

하지만 저는 여전히 브랜딩이라는 단어의 무게 중심을 "브랜드를 탄생 또는 재탄생시키는 일"에 두고 싶습니다. 그래서 우리 브랜딩 동료들이 자신의 손길로 탄생시킨 브랜드를 “자식과 같다”고 표현하는 것이 전혀 낯설지 않아요. 해외 브랜딩 에이전시 중에는 Mother라는 이름을 가진 에이전시가 있을 정도예요. (참고. 브랜드비가 간단하게 소개한 바 있습니다. 읽어보시려면 클릭!)


그런데, 이 고생끝에 탄생시킨 “아이”가 부모의 희망과는 달리 이상하고 잘못된 길에 빠져들었을 때, 우리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요?

최근 해외에서 화제가 된 사건 및 국내 사례들을 통해 함께 생각해 보아요.






“당신이 신중하게 만들어낸 정체성이 하룻밤 사이에 분열의 상징이 되었을 때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사랑과 연결에서 출발해 만든 브랜드가 두려움과 단절을 옹호하는 행동을 취하기로 결정했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Kim Berlin의 Substack 글에서 발췌>


이것은 2021년 론칭한 미국의 초저가항공 Avelo의 브랜딩을 담당한 디자이너 Kim Berlin의 이야기입니다. 일반적으로 항공사의 브랜딩 프로젝트는 글로벌 대형 에이전시가 맡아 진행하는 경우가 많은데요, Kim Berlin은 개인 디자이너로서, 또 여성으로서 Avelo 브랜딩 프로젝트 전체를 처음부터 끝까지 진행하여 화제가 된 바 있습니다. (물론 저는 창의적 개인의 무한한 힘을 믿고, 여성이 남성보다 결코 부족하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Kim Berlin의 사례가 업계에서 매우 희귀하다는 것은 인정해야 할 것 같아요.)


<Kim Berlin이 개발한 Avelo 브랜드 by Kim Berlin>




그런데 최근 Avelo가 미국 이민세관단속국(ICE)과 이민자 추방을 위한 항공 전세기 계약을 발표를 했습니다.



재정 문제를 겪고 있는 저가항공사가 안정적 고정 수익원을 확보한다는 것은 경영 측면에서는 옳은 결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브랜딩 측면에서는 최악의 결정이라고 할 수 있죠.

내가 타는 비행기가 이민자 추방 전용 전세기로 운영되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내가 앉은 자리가 강제로 추방되어 두려움과 슬픔과 고통에 떨던 이민자가 앉았을 수도 있던 공간임을 인지할 때, 과연 그 여행이 행복하고 즐거울 수 있을까요?


<Avelo 경영진과 Kim Berlin by Kim Berlin>


다시 창작자의 관점으로 돌아와 봅시다. Kim Berlin은 Avelo의 결정에 매우 놀랐다고 합니다. 브랜드를 개발할 당시 그들의 비전과 추진력에 감명을 받았었고, 착하고 성실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고도 했죠. 만약 당시 Avelo가 오늘날의 결정을 내릴 것을 알았다면, Avelo의 로고 디자인은 지금의 것이 아니었을 수도 있습니다.


Kim Berlin은 Avelo의 결정이 자신이 브랜딩 프로젝트를 수행했을 때의 기쁨과 만족감을 사라지게 하는 것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동안 받았던 영예가 취소되는 것도 아니라고 했죠.

하지만 더 이상 이 “아이”를 예전만큼 자랑스러워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대신 어찌할 수 없는 무력감과 안타까움이 함께하겠죠.






"직관적이고, 매우 간단하며, 효과적이고, 비싸지 않은 남성 그루밍 제품 브랜드가

저가 카피캣을 대표하는 패밀리 브랜드가 되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오픈워크는 면도기 구독 스타트업 와이즐리가 2021년 출시한 남성용 그루밍 제품 브랜드입니다. 브랜딩 및 제품 패키지 디자인은 뉴욕의 브랜딩 에이전시 Aruliden이 수행했습니다. 아마도 스타트업 버블이 한창이었을 당시 넉넉한 투자금을 받아 브랜딩에도 무척 신경쓴 것으로 보입니다. 사실 면도기 제품에서 그루밍 제품으로의 브랜드 확장 전략은 상당히 타당하고 적절하다고 생각되었어요. 특히 당시 국내에서 남성용 그루밍 시장은 막 떠오르고 있을 때였으니까요. 남성용 스킨케어를 4단계로 나누고 각 단계 별 제품 특징을 표현한 패키지 디자인은 비싸지 않은 가격에 충분히 매력적이었죠.


<Aruliden이 디자인한 오프워크의 로고 및 패키지 by Aruliden>




그런데, 몇 년 뒤 기업 와이즐리는 면도기 스타트업에서 생활소비재 커머스 기업으로 피봇을 했고, 깔끔하고 세련된 남성용 그루밍 브랜드였던 오픈워크는 저가 카피캣 제품을 아우르는 패밀리 브랜드로 변신해 있었습니다.


<카테고리 대표 유명 브랜드 제품들을 연상케 하는 오프워크의 제품들>




와이즐리가 피봇을 해야만 했던 이유, 오프워크가 초기 의도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띄게 된 배경에는 Avelo와 마찬가지로 “생존”이라는 이슈가 자리합니다.



“비용절감”이라는 미명 하에 와이즐리는 기존 개발한 오픈워크 브랜드를 재활용하는 전략을 채택합니다. 신규 브랜드 개발에는 당연히 돈이 드니까요.

제품 라인업도 그루밍 제품 뿐 아니라 여성용 화장품까지 확장했어요.



저는 오픈워크 브랜드를 Aruliden의 웹사이트를 구경하다 뒤늦게 알게 되었는데요, archiveB에 등록하기 위해 관련 정보를 찾아보다 현황을 알게 되었어요.

아름다운 오픈워크 로고가 평소 개인적으로 “극혐”하는 대놓고 베낀 패키지 디자인에 박혀 있는 모습이 어찌나 어색하고 애처롭던지요. 만약 내가 오픈워크 브랜딩에 참여했었다면 무척 화가 났을 것이예요. 하지만 브랜드의 소유권이 없는 에이전시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죠.






"프로젝트 진행 도중, 클라이언트가 카피캣 디자인을 요구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프로젝트를 중단해야 할까요, 묵묵히 요구에 따라야 할까요?" 


위의 오픈워크와는 비슷하면서도 조금은 다른 사례입니다.



<왼쪽: 필라이트 클리어 vs. 오른쪽: 아사히 수퍼드라이>


처음 필라이트 클리어의 디자인을 보았을 때 무척 당황스러웠어요. 특정 브랜드가 바로 연상되는 디자인이었기 때문이죠.

비록 두 제품이 발포주(기타주류)와 맥주(주류)로 명확히 다른 제품군임에도 브랜드 연상을 막기는 어려웠어요.


나란히 놓고 비교해보니 의심은 확신이 되었죠. 이 카피캣 디자인은 다분히 의도된 것이다!

사실 저는 당사자가 아니기에 이 결과물이 클라이언트의 요구인지, 디자인 에이전시가 제시한 전략인지는 명확히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저의 직업윤리 상으로는 결코 후자가 아닐 것이라고 믿고 싶어요. 


또 한편으로는, 만약 내가 담당한 브랜딩 프로젝트의 진행 과정 중 클라이언트가 이러한 요구를 했을 때, 과연 거절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해보았어요. 그동안 투입된 시간과 노력, 그리고 계약 불이행으로 인해 발생할 손해배상을 생각하면 꾸역꾸역 요구대로 수행했을 가능성이 다분히 높습니다.

저도 많지는 않지만 브랜딩 프로젝트가 잘못된 방향으로 진행되었던 경험이 있어요. 배가 침몰하고 있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아무런 손을 쓸 수 없는 무기력함에 절망하기도 했죠. 그렇게 탄생한 브랜드는 밖에 내놓기 부끄러운 “어둠의 아이”가 되어, 절대 Credit을 밝힐 수 없는 흑역사가 되어 버립니다. (만약 흑역사 하나 없이 깨끗한 에이전시가 있다면, 그 젊음과 행운이 무척 부럽네요!)






"야심차게 개발한 브랜드가 단 4개월 만에 단명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열심히 정리하고 있던 브랜딩 케이스 스터디를 발표해야 할까요, 숨겨야 할까요?"


펄스픽은 2025년 론칭한 숏폼 드라마 플랫폼입니다. 안타깝게도 제가 이 브랜드를 알게된 것은 론칭한지 4개월만에 서비스를 종료한다는 기사를 통해서였어요. 



그동안 수많은 브랜드 로고를 보아온 눈으로서 장담하건데, 이 브랜드는 분명 전문가의 손을 통해 탄생했습니다. 아마도 요즘 인기라는 숏폼 드라마의 새로운 브랜드를 만든다는 것에 큰 기대와 흥분을 갖고 작업했을 것이예요. 흐름을 잘 타면 네플릭스나 HBO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티빙이나 왓챠급의 인지도를 확보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희망찬 꿈에 부풀었겠죠. 고작 4개월만에 사라질 줄은 상상조차 못했을 것입니다.


그동안 제 경험에 미뤄보면 브랜드의 단명은 브랜딩 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 시장 환경이나 기업 경영 상의 문제인 경우가 훨씬 많아요.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재수 없게 단명한 브랜드를 만든 불운”은 오롯이 브랜드 창작자의 몫으로 돌아오게 되죠. 이 무속의 나라에서는 여전히 적지 않은 최고 의사결정자가 “무속”에 따라 에이전시와 브랜드를 선택하고 있기 때문이예요.

그래서 이 단명한 브랜드들도 부득이하게 “어둠의 아이”가 되어버리는 것이죠.







"창작자가 브랜드를 품에서 떠나보내야 할 때는 언제일까요?"


Kim Berlin의 결론처럼, 브랜딩 업계의 많은 선배님들이 “일은 일로서만 바라봐야 한다”라고 조언해 주신 바 있어요.

사실 브랜드가 엄청난 성공을 해도 성공보수를 더 받거나, 처참한 실패를 해도 손해배상을 하는 것은 아니기에 창작자와 브랜드와의 인연은 프로젝트 종료와 함께 끝난다고 보는 것이 맞겠죠.


하지만 창작의 산고를 겪은 분이라면, 이 귀하고도 소중한 “아이”와 완벽한 선을 긋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아실 것이예요. 저도 제 “아이”와 관련된 기사는 열심히 찾아서 읽어보게 되고, 수많은 브랜드 속에서도 한 눈에 구별할 수 있거든요. 승승장구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 마치 내가 그런 것처럼 으쓱해지기도 하고 말이죠.

Avelo나 오픈워크처럼 “잘못된 길로 들어선 아이”, 그리고 드러내 놓지 못하는 “어둠의 아이”들은 항상 마음 속에 아쉬움과 안타까움으로 자리잡고 있어요.


이렇게 “아이”들에 대한 애정을 마음에 품고 일하는 것이 비효율적인 감정과 에너지의 소비라고 생각할 수도 있어요.

하지만 긍정적인 면을 바라보자면, 이를 통해 다음 번의 “아이”는 더 완벽에 가까워질 수 있다고 생각해요.

또 개인적 직업윤리와 어긋나는 클라이언트는 아무리 유명세와 금전적 이익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 같아도 지양하자는 나름의 소신과 원칙도 갖게 되었고요.




여러분은 여러분의 “아이”를 언제 품에서 떠나보내고 있나요? 

또 떠나보낸 “아이”는 기록을 남겨야 할 존재일까요, 숨겨야 할 존재일까요?

2025 MA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