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마케팅 업계에는 ‘경쟁 PT (Presentation)’ 또는 ‘시안 비딩(Bidding)’이라고 하는 프로세스가 있습니다. 광고주가 프로젝트 진행 전에 3~4개 업체를 불러 간단히 설명을 하고, 광고마케팅 전략과 시안을 발표시키는 건데요, 굉장히 짧은 준비 시간과 그 대비 높은 퀄리티의 광고 시안을 기대하기 때문에 아주 악명이 높습니다. 잠도 못 자고 아이디어를 쥐어짜내는 고통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죠.
승자가 모든 것을 갖는다. 하지만 승자는 클라이언트 뿐.
광고마케팅과 연관성이 높아서인지, 그 영향을 받아 브랜딩 업계에도 동일한 프로세스가 존재합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매우 반대하는 공모전 프로세스와 개념은 같아요. 1등 업체만 일에 대한 비용을 보전 받을 수 있고, 나머지 참가 업체들은 아무런 보상이 없습니다.
최악의 경우도 있는데요, 바로 클라이언트가 마음에 드는 것이 없다며, 또는 사업 계획이 변경되었다며 1등을 선정하지 않는 겁니다. 거기다 심지어 몇 년 뒤에 슬그머니 유사한 네임이나 디자인을 사용하는 사례도 있어요.
왜 하는거야?
경쟁 PT를 준비하는 과정이 너무 힘들고, 또 리스크도 크기 때문에 당연히 아무도 참여하지 않을꺼라고 생각하실 수 있어요. 그런데 실제로는 여전히 경쟁 PT 요구가 빈번히 일어나고, 적지 않은 에이전시들이 리스크를 감수하면서 참여를 하고 있어요.
클라이언트는 공정한 선정을 위해, 또 잘못된 선택에 대한 리스크를 줄이기 위함이라고 말하고 있고요, 에이전시들은 더 유명한 포트폴리오 사례를 얻기 위해, 조금이라도 더 프로젝트 수주의 기회를 높이기 위함이라고 해요.
결국은 유명한 대기업들이 경쟁 PT 요구를 많이 하고, 아이러니하게도 규모가 작은 영세한 에이전시들이 희생양이 되곤 하죠.
경쟁PT를 반대하는 목소리들.
해외에서는 최근들어 경쟁PT를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는 에이전시들이 늘고 있어요.
공식 웹사이트에 공개적으로 경쟁PT를 하지 않는다고 밝히고 있는데요, 그 이유를 살펴볼까요?
“우리는 경쟁PT나 무료 시안 비딩을 하지 않습니다. 대신 우리는 우리 앞에 당면한 도전을 이해하는데 시간과 고민을 투자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어요.”
- Big fish
“훌륭한 디자인은 협업과 이해 그리고 신뢰를 바탕으로 합니다. 무료 경쟁PT는 협업, 이해, 신뢰에 도움되지 않아요. 우리의 일은 엄청난 가치를 창출하고 있고, 우리는 그것을 자랑스러워 하고 있습니다. 제발 우리에게 그것을 포기하라고 요구하지 말아주세요.”
- This way up
“우리는 고객에게 세계적 수준의, 독창적이고 지속가능한 브랜드 구축 솔루션을 제공합니다. 우리는 무료 경쟁 PT나 무료 시안 제공을 하지 않습니다. 그건 어떤 누구에게도 좋은 비즈니스가 아니예요. 우리는 전문적이고, 가치있고, 효과적인 결과물은 긴밀한 협업과 상호 파트너십, 그리고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만들어진다고 믿습니다.”
- Pearlfisher
경쟁PT의 대안은 없을까?
저도 한 때 잠깐 클라이언트의 입장이었을 때, 경쟁PT를 시킬 수 밖에 없는 상황을 겪었어요. 클라이언트의 입장에선 경쟁PT가 전혀 손해가 아니기 때문에, 조직 내에서는 경쟁PT를 진행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비난의 대상이 되죠. 또 실제로 경쟁PT에 참여하겠다고 하는 에이전시들은 대부분 조직 내부에 연줄을 갖고 있었어요. 연줄을 믿어서인지, 아니면 체면치례로 참여한 것인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제안 내용이 그다지 좋지는 않았어요. 결과가 어땠는지는 예상 되죠?
그래서 저는 에이전시들이 어떤 이유에서라도 반드시 경쟁PT를 거절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참여자가 전혀 없는데 어떻게 경쟁이 이뤄지겠어요? 그럼 클라이언트도 다른 대안을 모색하겠죠.
경쟁PT 외에 에이전시의 실력을 검증할 수 있는 별도의 프로세스, 업무에 대한 합리적인 대가 책정 등에 대해 고민을 시작해야 합니다.
이는 제가 브랜드비를 시작한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평소 브랜딩할 일이 많지 않기에, 프로세스도 잘 모르고 어떤 에이전시를 선택해야 할지도 잘 모르는 클라이언트에게 합리적 의사결정 방법을 제안하고 싶었어요. 주변 주인에게 물어물어 "이 에이전시 유명해" 내지 "요즘 이 에이전시 잘 나가"가 아닌, 업무 분야 별로 특장점을 지닌 에이전시들을 찾아보고 그 중 프로젝트 목적에 적합한 에이전시들을 선택하게 하는 것이죠. 전자는 아무리 지인 추천이라 하더라도 실력을 알 수 없기에 경쟁PT라는 내부 설득 과정을 거칠 수 밖에 없지만, 후자는 에이전시에 대한 이해와 포트폴리오를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가늠해 볼 수 있어요. 브랜드비는 중간에서 에이전시 선택 요령, 업무 범위 산정 및 프로세스에 대해 가이드를 해 주는 역할을 담당하고자 합니다.
또, 더 나아가 경쟁PT가 아닌 "협업"이라는 방법으로 원하는 브랜딩을 해 낼 수 있다고 생각해요. 브랜딩의 궁극적 목표는 최고의 에이전시를 선택하는 것이 아닌, 최상의 결과물을 창출하는 데 있으니까요. 유명 에이전시가 개발했다고 해서 반드시 브랜딩이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체험한 클라이언트라면 공감하실 것이예요. 실제로 유명세만 믿고 덜컥 맡겼다가 결과물이 마음에 들지 않아 다른 에이전시 또는 자체적으로 재작업 하는 사례를 적지 않게 봐왔습니다. 브랜드비의 "협업"의 방식은 추후 기회가 되면 실증 사례로 보여드겠습니다.
우리 경쟁PT는 참여하지 않기로 해요.
PS. 추가로 공모전도요!
2022 APR 초안 작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