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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에서 일할 것인가보다 무엇을 쌓을 것인가

제가 처음 브랜딩 에이전시에 몸담게 된 것은 아주 우연한 계기였습니다. 교수님의 지인이 사람을 구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지원하게 되었죠. 당시만 해도 ‘브랜드’라는 개념 자체가 지금처럼 익숙하지 않았습니다. 브랜딩 업무만 전문적으로 하는 회사가 있다는 사실도 그때 처음 알게 되었고요. 무척 흥미로웠고, 무엇보다 일이 재미있을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입사하고 나서는 그 선택을 얼마나 후회했는지 모릅니다. 엄청난 박봉에 대중없는 야근이 이어졌습니다. 회사에서 가장 나이가 어린 여사원이라는 이유로 전화 응대와 설거지도 제 몫이었습니다. 한창 업무에 몰두하고 있을 때 흐름을 끊어버리는 전화를 받는 일은 생각보다 꽤 짜증나는 일이었습니다. 또 지긋지긋한 설거지는 지금까지도 제가 집안일을 싫어하는 데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친 것 같습니다.


당시는 최저임금에 대한 개념도 지금처럼 자리 잡지 않았던 때입니다. 사회초년생으로서 정말 적은 연봉을 받았지만, 회사의 태도는 오히려 “우리가 가르쳐주니 네가 돈을 지불해야 할 판인데, 월급이라도 받는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라”에 가까웠습니다. 디자인 업계에 도제식 문화가 강하게 남아 있던 시절이었으니까요.

대기업에 들어간 친구들과 연봉 이야기를 할 때면 주눅이 들었습니다. 모교에 방문했다가 교수님이 어디에 취직했느냐고 물었는데, 아무도 모르는 작은 회사라는 이유로 무시당한 기억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만둘 용기도 없었습니다. 지금처럼 이직이 자연스럽지 않았던 시절이었고, 사회초년생이었던 저는 회사를 그만둔 뒤 다시 취직하지 못할까 봐 두려웠습니다. 그렇게 꾸역꾸역 2년을 채웠습니다. 그 후 잠시 도피하듯 업계를 떠났다가 결국 다시 브랜딩으로 돌아왔습니다. 익숙한 일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브랜딩이라는 일 자체는 재미있었기 때문입니다.


이후 몇 번의 에이전시를 옮겼고 프리랜서 생활도 꽤 오래 했습니다. 그러다 어느 브랜딩 프로젝트에서 회장님의 눈에 띄어 일반 기업의 인하우스 조직으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에이전시에서 브랜드의 기초를 만드는 일만 해봤으니 이제 직접 브랜드를 운영하고 키워보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곳에서의 경험 역시 제 예상과는 많이 달랐습니다. 약 3년을 채우고 저는 다시 브랜딩 업계로 돌아왔습니다.


돌고 돌아 에이전시와 인하우스를 모두 경험해본 셈입니다.

 

서론이 다소 길어졌는데요, 저의 오래된 이야기를 늘어놓은 이유는 사회초년생 디자이너들에게 종종 받는 질문이 있기 때문입니다.

"에이전시와 인하우스, 어디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을까요?"


지금의 저는 어디가 더 좋다고 답하기보다 질문을 조금 바꿔보고 싶습니다.

"어디에서 일할 것인가보다, 그곳에서 무엇을 쌓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해봤나요?"






같은 2년도 쌓이는 경험은 다르다


흔히 에이전시와 인하우스의 차이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에이전시는 여러 브랜드를 얕고 넓게 경험하고, 인하우스는 하나의 브랜드를 오랫동안 깊게 경험한다고요.

하지만 관점에 따라서는 정반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브랜딩 에이전시에서는 하나의 브랜드를 3개월이나 6개월 정도밖에 담당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기간에는 거의 매일 그 브랜드만 생각합니다. 시장과 경쟁사를 조사하고, 브랜드의 정체성과 전략을 고민하고, 디자인하고, 평가받고, 수정합니다. 프로젝트가 끝나면 다시 전혀 다른 산업과 브랜드를 만나 같은 과정을 반복합니다. 짧지만 굉장히 밀도가 높습니다.


반면 인하우스에서는 하나의 브랜드를 몇 년 동안 담당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몇 년 내내 브랜드의 정체성과 디자인만 고민하는 것은 아닙니다. 예산을 관리하고, 기안서와 보고서를 쓰고, 유관부서와 협의하고, 회의를 하고, 외부 업체를 관리합니다. 디자이너라면 다른 부서에서 들어오는 크고 작은 디자인 요청에도 대응해야 합니다. 공식적인 요청도 있지만 때로는 원활한 협업을 위해 거절하기 어려운 사적인 부탁도 있습니다. 회사생활이라는 것이 언제나 원칙대로만 돌아가지는 않으니까요.


그래서 저는 에이전시와 인하우스의 차이는 경험의 밀도’와 ‘경험의 범위’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에이전시에서는 브랜드를 설계하고 디자인하는 경험의 밀도가 높습니다.

인하우스에서는 하나의 브랜드를 조직 안에서 운영하는 경험의 범위가 넓습니다.

어느 쪽이 우월하다는 의미는 절대 아닙니다. 다만 같은 2년을 보내도 서로 다른 능력이 쌓인다는 뜻입니다.






20년이 지나도 에이전시는 왜 박봉과 야근으로 유명할까


제가 사회생활을 시작한 지 20여 년이 지났지만 디자인 에이전시는 여전히 박봉과 야근으로 유명합니다.

물론 과거의 도제식 문화나 낮은 보상을 당연시하는 태도는 바뀌어야 합니다. 하지만 오랫동안 이 업계에서 일해온 에이전시를 운영하는 입장에서 보면, 이것을 단순히 에이전시의 의지 부족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습니다.


에이전시 비즈니스는 기본적으로 불확실합니다. 올해 프로젝트가 많았다고 해서 내년에도 같은 매출이 보장되지 않습니다. 일이 한꺼번에 몰릴 때도 있고 갑자기 끊길 때도 있습니다. 프로젝트의 규모와 기간 역시 제각각입니다. 이런 환경에서 고정비인 인건비를 크게 늘리는 것은 작은 에이전시에게 상당한 부담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에이전시에 안정적인 수익을 가져다주는 일이 반드시 디자이너들이 하고 싶어 하는 일인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반복적이고 크리에이티브의 여지가 적은 업무가 안정적인 매출원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전에 한 편집디자인 회사에 관한 전설적인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크리에이티브 프로젝트만으로는 회사를 안정적으로 운영하기 어려워 전단지, 소위 ‘찌라시’ 디자인 서비스를 함께 운영했다고 합니다. 문제는 모든 디자이너가 그 업무를 맡기 싫어했다는 것이죠. 결국 한 달에 한 명씩 돌아가며 담당했다고 합니다.

누구도 하고 싶어 하지 않는 일이었지만, 역설적으로 그 일이 회사에 꾸준한 수익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확보한 안정적인 매출 덕분에 당장의 수익성을 크게 따지지 않고 크리에이티브 프로젝트에 더 많은 시간과 비용을 투입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어쩌면 이것이 크리에이티브 비즈니스가 가진 딜레마인지도 모릅니다.

하고 싶은 일만으로 회사를 운영하기는 어렵고, 하고 싶지 않은 일이 하고 싶은 일을 지속할 수 있게 해주기도 합니다.


사람을 채용한다고 곧바로 생산성이 올라가는 것도 아닙니다. 특히 신입 디자이너가 에이전시에서 기대하는 수준의 결과물을 내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선배가 가르치고, 함께 프로젝트를 경험하면서 시행착오를 거쳐야 합니다. 그렇게 이제 어느 정도 일을 할 수 있겠다 싶으면 이직하는 경우가 생깁니다. 에이전시에서 실력을 쌓은 디자이너에게 더 높은 연봉과 안정적인 환경을 제시하는 인하우스는 매력적인 선택지이기 때문입니다. 에이전시는 다시 사람을 뽑고 처음부터 가르칩니다.


채용 > 교육 > 성장 > 이직 > 다시 채용


이런 과정이 반복되면 조직의 역량을 안정적으로 축적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상당수의 디자인 에이전시가 오랫동안 소규모 조직으로 운영되는 이유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직원에게 낮은 연봉과 야근을 감수하라고 이야기할 수는 없습니다. 반대로 에이전시 대표에게 무조건 연봉을 높이고 야근을 없애라고 말하는 것만으로 해결되기도 어렵습니다.

크리에이티브 비즈니스의 불확실성과 인재 육성에 필요한 시간, 그리고 성장한 인재가 더 좋은 조건을 찾아 이동하는 인력시장의 구조가 서로 맞물려 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야근 시간이 아니라 경험의 밀도다


야근에 대해서도 조금 다른 관점이 필요합니다.


국내 에이전시의 경우 늦게까지 남아 있는 것이 성실함이나 열정의 증거처럼 여겨지곤 했습니다.


그런데 글로벌 에이전시에서 근무했던 사람에게 들은 이야기는 우리나라와는 정반대였습니다.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부터 직급별 투입 인원과 시간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무조건 오래 일한다고 좋은 평가를 받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주어진 시간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사용한다면 오히려 시간당 퍼포먼스가 떨어지는 사람으로 평가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디자이너들은 회사에서 야근을 하는 대신 집으로 일을 가져가 추가 작업을 하기도 한다고 합니다. 카운트되지 않는 자발적 야근인 셈이죠. 당연히 야근수당도 발생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퍼포먼스가 뛰어난 인재로 인정받고, 다음 프로젝트에 다시 투입되기 위해 이를 기꺼이 감수한다고 합니다.


이 사례가 모든 글로벌 에이전시에 해당한다고 일반화할 수는 없겠지만, 저에게는 꽤 인상적인 이야기였습니다.

회사에 오래 남아 있는 것과 많이 배우는 것, 그리고 실력 있는 디자이너가 되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저 역시 젊었을 때 수없이 밤을 새웠습니다. 당시에는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었지만, 지나고 보면 그 시간의 일부는 제 기준과 실력을 만드는 데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렇다고 “박봉과 야근을 견뎌야 좋은 디자이너가 된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회사가 낮은 보상을 주면서 과도한 노동을 요구하는 것은 조직의 문제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결과물에 어느 정도까지 욕심을 낼 것인가는 또 다른 문제입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얼마나 오래 일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높은 기준을 갖고 얼마나 집중해서 경험했느냐​입니다.






에이전시에서 인하우스로는 가는데, 왜 반대는 어려울까


에이전시와 인하우스 사이의 커리어 이동은 조금 비대칭적입니다.

에이전시에서 경력을 쌓은 뒤 인하우스로 이동하는 경우는 흔합니다. 기업에서도 에이전시 경력을 가진 디자이너를 선호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장 직접적인 이유는 디자인 실무 능력입니다. 에이전시에서는 짧은 기간 동안 다양한 프로젝트를 반복하기 때문에 디자인을 만드는 훈련량이 많습니다. 기업은 이런 인력을 영입함으로써 내부 디자인 역량을 높일 수 있습니다.


경제적인 이유도 있습니다. 내부에서 해결할 수 없는 디자인 업무는 외부 에이전시에 맡겨야 합니다. 외부의 전문성을 활용하는 것은 당연히 필요한 일이지만 그만큼 지속적인 예산이 필요합니다. 기업 입장에서는 그동안 외부에 맡겨왔던 업무 중 일부를 내부에서 해결할 수 있다면 비용과 운영 측면에서 이점이 있습니다. 다양한 프로젝트를 경험한 에이전시 출신 디자이너가 매력적인 이유입니다.


반대 방향은 조금 어렵습니다.

인하우스에서 오랫동안 일한 뒤 전문 에이전시의 시니어 디자이너로 옮기려면 자신의 연차에 걸맞은 디자인 감각과 전문성을 바로 보여줘야 합니다. 같은 5년이라도 오롯이 브랜드와 디자인을 반복해서 고민한 5년과, 디자인과 함께 예산, 기안, 보고, 회의, 협력업체 관리 등을 수행한 5년은 축적되는 경험의 종류와 밀도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에이전시 경험은 인하우스가 필요로 하는 역량에 포함되기 쉽지만, 인하우스에서 쌓은 경험이 에이전시가 요구하는 전문성을 그대로 대체하기는 어려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인하우스 경험의 가치가 낮다는 뜻은 아닙니다.






인하우스에 가서야 보이기 시작한 것들


오히려 저는 인하우스에서 에이전시에 있을 때 알지 못했던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가장 큰 것은 조직의 의사결정이 얼마나 복잡한가였습니다.


에이전시에 있을 때는 좋은 전략과 좋은 디자인을 만드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좋은 안을 제안했는데 선택되지 않으면 클라이언트가 좋은 디자인을 알아보지 못한다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조직 안으로 들어가 보니 중요한 의사결정이 브랜드 자체의 논리만으로 이루어지는 경우는 생각보다 많지 않았습니다. 예산과 일정, 부서 간 이해관계, 경영진의 생각, 과거의 성공과 실패, 조직 내부의 알력, 심지어 외부에서는 알 수 없는 사소한 사건까지 의사결정에 영향을 미칩니다.


에이전시를 선택하는 기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에이전시에서는 경쟁사보다 더 좋은 전략과 디자인을 만드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인하우스 입장에서는 일정 수준 이상의 전문성을 갖춘 에이전시라면 실력 외의 다른 요소들이 중요해집니다.


  • 친절하고 신속하게 대응하는가.
  • 예상하지 못한 요구에도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는가.
  • 문제가 생겼을 때 피하지 않는가.
  • 어려운 상황에서도 끝까지 함께할 수 있는가.


때로는 새롭고 혁신적인 제안보다 이미 잘 알고 있는 익숙한 파트너를 선택하기도 합니다.

결국 인하우스에서 알게 된 것은 좋은 디자인을 만드는 능력과 좋은 디자인을 조직 안에서 실현시키는 능력은 다르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경험은 다시 에이전시로 돌아온 뒤 클라이언트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특히 훗날 에이전시를 운영하거나 영업과 클라이언트 관리를 담당한다면 인하우스 경험은 상당한 자산이 될 수 있습니다.






디렉터가 되면 좋아하는 디자인만 할 수 있을까


주니어 디자이너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브랜드 디렉터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라는 직책에 대한 환상이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연차가 쌓이고 디렉터가 되면, 귀찮고 지루한 반복 업무는 주니어들이 하고 자신은 중요한 디자인에만 집중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현실은 오히려 반대에 가깝습니다. 연차가 높아질수록 직접 디자인하는 시간은 줄어듭니다. 대신 판단하고, 평가하고, 피드백하고, 사람을 관리하고, 예산을 관리하고, 클라이언트나 다른 부서를 설득하는 시간이 늘어납니다. 인하우스에서는 특히 그렇습니다. 조직에서 위로 올라갈수록 디자인 실무보다는 예산 관리, 부서 간 협의, 외부 업체 관리와 같은 관리자 역할이 커집니다.

에이전시라고 크게 다르지는 않습니다.


얼마 전 초기 디자인 에이전시 파운더들의 모임에 참석한 적이 있습니다. 대부분 1인 기업이었는데, 공통적인 고민 중 하나가 언제 직원을 뽑아야 하는가였습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흥미로운 점이 있었습니다. 프로젝트에서 재미있고 중요한 부분은 자신이 하고, 단순하고 시간이 많이 드는 작업을 해줄 주니어가 필요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자신들이 주니어 시절 그렇게 싫어했던, 그리고 여전히 하기 싫은 바로 그 역할을 다시 누군가에게 맡기고 싶은 것이죠.


사실 너무나 당연한 생각입니다. 어쩌면 조직이 만들어지는 자연스러운 과정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내가 얻는 것이 있다면, 당연히 주는 것도 있어야 합니다. 단순히 경영자이기 때문에, 경력이 더 많기 때문에 일이 더 쉽고 편해질 것이라는 생각은 오산입니다.


그래서 커리어를 생각할 때는 ‘언제쯤 재미없는 일을 하지 않아도 될까?’라든가 ‘언제쯤 멋지고 폼나게 일할 수 있을까?’보다 다른 질문이 필요합니다.


나는 10년 뒤에도 직접 만드는 사람이고 싶은가.

방향을 제시하고 판단하는 사람이고 싶은가.

아니면 사람과 조직을 움직이는 사람이 되고 싶은가.


직함보다 중요한 질문입니다.






첫 연봉 200만 원 차이보다 중요한 것


가끔 디자이너 취업 관련 단체 채팅방의 대화를 들여다보곤 합니다. 제가 나이가 있다 보니 요즘 친구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그들을 이해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흥미로운 것은 취업을 위해 수백만 원짜리 포트폴리오 강의나 교육에는 기꺼이 투자하면서, 막상 회사를 선택할 때는 연봉 100만~200만 원 차이에 상당히 민감하다는 점입니다.


물론 연봉은 중요합니다. 특히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사람에게 100만~200만 원은 결코 작은 돈이 아닙니다. 그런데 조금 다른 계산도 필요하지 않을까요?

취업 전에는 자신의 실력을 높이기 위해 수백만 원을 투자하면서, 정작 취업 후 어떤 선배와 일하게 되는지, 어떤 수준의 프로젝트를 경험하게 되는지, 몇 년 동안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를 반복하게 될지는 연봉만큼 꼼꼼하게 따져보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연봉은 숫자로 비교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좋은 디렉터 밑에서 2년 동안 일한 경험이 얼마짜리인지, 높은 수준의 프로젝트를 세 번 경험하는 것과 작은 프로젝트를 열 번 경험하는 것의 차이가 얼마인지는 숫자로 계산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사회초년생이라면 첫 직장의 보상을 조금 넓게 봤으면 합니다.

금전적 보상뿐 아니라 어떤 경험을 얻는가, 어떤 기준을 배우는가, 누구와 일하는가, 그리고 그 경험이 몇 년 뒤 자신의 시장가치를 어떻게 바꿀 것인가까지 포함해서 말입니다.


첫 직장은 학교가 아니고, 회사가 낮은 임금을 정당화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사회초년생 입장에서는 돈을 받으며 동시에 경험을 축적하는 곳이기도 합니다.

현재의 연봉 숫자에만 연연하기보다 미래의 나에게 무엇이 남는가도 계산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에이전시와 인하우스, 어디가 좋을까


결국 절대적인 정답은 없습니다. 물론 저 개인으로서는 에이전시를 선호하는 입장이긴 합니다.


다양한 브랜드를 경험하면서 디자인 전문성과 감각을 빠르게 높이고 싶다면 에이전시가 잘 맞을 수 있습니다. 대신 상대적으로 낮은 보상과 불규칙한 업무환경을 어느 정도 감수해야 합니다.


하나의 브랜드가 조직 안에서 실제로 어떻게 운영되고 성장하는지를 경험하고 싶다면 인하우스가 더 많은 것을 가르쳐줄 수 있습니다. 디자인 외에 조직, 예산, 협업, 의사결정에 대한 경험도 쌓을 수 있습니다.


연봉과 안정적인 경력 관리가 중요하다면 에이전시에서 초기 전문성을 쌓은 뒤 인하우스로 이동하는 것도 현실적인 전략입니다.


반대로 오랫동안 직접 디자인하는 사람으로 남고 싶다면 회사가 에이전시인지 인하우스인지뿐 아니라 시니어가 된 뒤에도 전문성을 유지하며 실무를 할 수 있는 구조인지를 살펴보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향후 자신의 에이전시를 만들고 싶다면 두 환경을 모두 경험하는 것도 도움이 됩니다. 디자인을 만드는 사람의 입장뿐 아니라 디자인을 구매하고 조직 안에서 실행하는 사람의 입장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커리어에는 일만 존재하지 않습니다.

저는 그동안 결혼과 임신, 출산을 계기로 에이전시를 떠나 인하우스로 이동한 여성 디자이너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뛰어난 실력을 가졌음에도 커리어를 포기하고 전업주부로 전향한 사례도 꽤 됩니다. 당시의 에이전시 근무환경에서는 일과 육아를 병행하기가 현실적으로 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제도와 문화가 과거에 비하면 많이 좋아졌지만 여전히 애로사항은 존재하고, 삶의 조건에 따라 직업 선택의 기준이 달라진다는 사실 역시 변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커리어는 하나의 기준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에 설계할 수 없습니다. 설령 설계를 하더라도 실제로는 수많은 변수와 예상치 못한 상황을 맞이하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각 시점에 무엇을 얻고 무엇을 포기할 것인지 선택하는 것입니다.






어디에서 일할 것인가보다 무엇을 쌓을 것인가


사회초년생에게는 첫 연봉과 회사의 이름이 무엇보다 중요하게 느껴집니다. 저 역시 그랬습니다.

하지만 20여 년이 지난 지금 돌아보면 첫 직장에서 받은 연봉보다 더 오래 남은 것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어떤 능력을 키웠는가.

어떤 기준을 세웠는가.

무엇을 보는 눈을 갖게 되었는가.


물론 당시의 낮은 연봉과 불합리한 조직문화까지 좋은 경험이었다고 미화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하루 종일 전화를 받았다고 커뮤니케이션 능력이 좋아지는 것도 아니고, 밤을 많이 새웠다고 반드시 실력이 좋아지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그 시간을 지나면서 제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어떤 일을 잘하고 싶은지, 어떤 수준의 결과물을 만들고 싶은지에 대한 기준은 조금씩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지금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디자이너라면 첫 직장을 고를 때 ‘어디가 더 좋은 회사인가?’만 묻지 않았으면 합니다.

에이전시냐 인하우스냐도 물론 중요합니다. 연봉도, 복지도, 회사의 이름도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것만큼 한 가지 질문을 더 해봤으면 합니다.


"이곳에서 보내는 2년은 나를 어떤 사람으로 만들 것인가?"


사회초년생의 커리어를 결정하는 것은

첫 직장의 이름보다 그곳에서 무엇을 쌓았는가입니다.

2026 AU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