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ure image
브랜드 플랫폼의 가치와 의미

얼마 전 지인으로부터 새롭게 런칭하는 브랜드의 브랜드 플랫폼을 살펴봐 달라는 부탁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비전(Vision), 미션(Mission), 핵심가치(Core Value), 브랜드 슬로건까지 모두 정리되어 있었는데요. 문장도 매끄럽고 표현도 세련됐습니다. 얼핏 보면 전문 브랜딩 에이전시가 만든 결과물처럼 보였습니다. 지인은 이 모든 결과물을 AI로 만들었다며 무척 뿌듯해했습니다.


사실 저는 크게 놀라지 않았습니다. 요즘 AI를 사용하면 브랜드 플랫폼 정도는 충분히 그럴듯하게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놀라웠던 것은 지인이 AI가 만든 결과물에 큰 만족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전문가인 저의 검증을 받고 싶어 했다는 점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솔직한 의견을 드리지 못했습니다. 좋은 단어로 가득했지만 정작 브랜드의 지향점과 차별점은 보이지 않는, 공허한 브랜드 플랫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그 이유를 설명한들 쉽게 납득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오히려 브랜드 컨설팅을 유도하기 위해 일부러 문제를 지적한다고 받아들였을지도 모릅니다.


그 순간 문득 세 가지 질문이 떠올랐습니다.


  • 공허한 브랜드 플랫폼은 AI 때문일까?
  • 아니면 브랜드 자체가 아직 충분히 정의되지 않았기 때문일까?
  • 혹시 우리가 그동안 해왔던 브랜드 플랫폼 컨설팅 자체가 형식적인 프로세스였던 것은 아닐까?






AI에게 부탁한 건기식 브랜드 플랫폼


당시 제가 느꼈던 공허함을 여러분과 공유하기 위해 가상의 건강기능식품 브랜드를 설정하고 AI에게 브랜드 플랫폼을 요청해 보았습니다.

*실제 사례는 NDA 때문에 공개할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솔직히 말하면 크게 어색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꽤 그럴듯합니다.

하지만 브랜드 이름을 지우고 다른 건강기능식품 브랜드 이름을 넣어보면 어떨까요? 아마 대부분 그대로 사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AI가 잘못 만들었다는 것이 아니라, 너무 많은 브랜드에 적용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브랜드를 설명하는 문장은 있었지만, 이 브랜드만의 고유한 정체성과 관점을 드러내는 문장은 없었습니다.






AI 때문이 아니다, 브랜드가 비슷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AI 때문에 브랜딩이 획일화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무조건적으로 AI를 탓할 수만은 없습니다. 어쩌면 인과관계가 반대가 아닐까요?


AI는 평균적인 답을 생성합니다. 그런데 입력되는 브랜드 정보 자체가 평균적이라면 결과 역시 평균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아래 이미지는 AI의 한계를 풍자한 이미지입니다. 조금 과장된 면이 없잖아 있지만, 입력값이 부실하면 결과 역시 부실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수백 개의 브랜드가 경쟁하는 건강기능식품 시장은 획일화된 브랜딩 사례가 가장 많은 분야이기도 합니다.

대부분의 제품은 ODM·OEM 방식으로 생산되고 동일하거나 유사한 원료를 사용합니다. 기능성 표현 역시 법적으로 제한되기 때문에 제품 차별화의 폭도 크지 않습니다.

결국 브랜드가 이야기하는 내용도 비슷해집니다.


  • 프리미엄 원료
  • 고기능성·고함량 성분
  • 믿을 수 있는 제조사
  • 간편한 섭취 방법


물론 모두 중요한 정보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제품 속성을 나열할 뿐 브랜드의 관점은 아닙니다.

이런 상태에서 브랜드 플랫폼을 만들면 사람이라도 AI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결과를 만들 가능성이 높습니다. 단어 선택이나 문장 표현이 조금 더 세련되거나 독특할 뿐, 결국 누구에게나 적용 가능한 비전과 미션이 탄생하게 됩니다.






브랜드가 관점을 잃으면 결국 경쟁은 디자인으로 이동한다


브랜드만의 관점이 없다면 무엇으로 경쟁하게 될까요? 결국 디자인입니다.


비슷한 제품, 비슷한 브랜드 플랫폼, 비슷한 슬로건. 브랜드가 이야기하는 내용이 비슷해질수록 소비자가 구분할 수 있는 것은 결국 시각적인 차이뿐입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누가 더 트렌디하고 세련된 패키지를 만들었는지, 누가 더 감각적인 컬러와 이미지를 활용했는지가 중요한 경쟁력이 됩니다.


물론 디자인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지만 디자인은 브랜드의 관점을 표현하고 전달하는 수단이지, 관점 자체를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브랜드의 관점이 사라질수록 브랜딩은 점점 스타일링에 가까워집니다. 결국 경쟁은 ‘무엇을 말하는가’보다 ‘어떻게 보이는가’로 이동합니다. 최근 건강기능식품 브랜드들이 뷰티나 패션 브랜드와 유사한 톤앤매너를 차용해 차별화를 시도하는 경향도 이를 잘 보여줍니다.






브랜드 플랫폼은 관점에서 시작한다


그렇다면 좋은 브랜드 플랫폼은 무엇이 다를까요?

차이는 표현의 수준이 아니라 브랜드가 시장을 바라보는 관점에 있습니다.





SMART STRAINS


대부분의 프로바이오틱스 브랜드는 수십억 마리의 유익균 숫자를 강조합니다. 하지만 Smart Strains는 전혀 다른 질문을 던집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유익균의 숫자일까?'

Smart Strains는 적절한 균주를, 적절한 시간에, 적절한 방법으로 섭취하는 것을 핵심 개념으로 삼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제품이 아니라 프로바이오틱스를 바라보는 기준 자체를 바꾼 것입니다.





EQUIP FOODS


Equip Foods 역시 단순히 단백질 함량을 강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진짜 식품의 힘을 믿으면서도, 현대인의 식생활 환경에서는 안전하면서도 충분한 영양을 섭취하기 어렵다는 현실을 함께 바라봅니다. 그래서 'Food First'​라는 철학을 중심으로 진짜 식품과 화학 합성 건기식 사이에 자신만의 위치를 만들어냅니다.





WENATAL


WeNatal도 마찬가지입니다. 대부분의 임신 관련 건기식 브랜드가 임신 이후의 건강 관리에 집중하는 반면, WeNatal은 건강한 임신은 임신 전부터 시작되며 여성뿐 아니라 남성도 함께 준비해야 한다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합니다.




세 브랜드의 공통점은 제품의 성분을 나열하며 설명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먼저 시장의 상식을 의심하고, 새로운 질문을 던집니다.

브랜드 플랫폼은 그 질문을 정리하고 답을 제시하는 결과입니다.






브랜드 플랫폼은 정말 브랜딩의 출발점이었을까?


여기서 조금 불편한 질문을 하나 던져보고 싶습니다.

그동안 브랜드 플랫폼은 정말 브랜드를 정의하는 기준이었을까요?


브랜드 플랫폼은 오랫동안 브랜딩 프로젝트의 핵심 산출물 중 하나로 여겨져 왔습니다. 동시에 많은 프로젝트에서 브랜딩의 출발점으로도 설명되었습니다.

비전과 미션, 핵심가치, 브랜드 에센스, 퍼스널리티를 정의하기 위해 수차례 인터뷰와 워크숍을 진행하고 수십 페이지에 달하는 보고서를 작성합니다.

하지만 프로젝트가 끝난 뒤 그 플랫폼은 얼마나 활용되었을까요?


솔직히 말해 봅시다.


많은 경우 브랜드 플랫폼은 웹사이트의 기업 및 제품 소개 페이지에 한 번 소개되거나, 두꺼운 최종 보고서로서 남겨질 뿐입니다.

브랜드 네임을 만들 때도, 로고와 디자인 시스템을 구축할 때도, 이후의 마케팅과 커뮤니케이션에서도 정작 브랜드 플랫폼이 의사결정의 기준으로 적극 활용되지 않는 경우를 적지 않게 보았습니다. 심지어 브랜드 담당자가 그 내용을 자세히 읽어보지 않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결국 국내 현장에서 브랜드 플랫폼은 브랜드를 정의하는 기준이라기보다, '우리는 제대로 과정을 밟았다.' 내지 '충분히 고민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증거 문서에 가까웠던 것은 아닐까요?

그렇기에 많은 사람들이 AI가 만든 결과물이 브랜드만의 관점을 담고 있는지 고민하기보다, 잘 정리된 문서 하나를 받았다는 사실만으로도 만족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결국 중요한 의사결정과 눈에 보이는 결과물은 그 문서가 아니라 이후의 네이밍, 디자인, 마케팅 과정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AI가 이 정도까지 브랜드 플랫폼을 만들어준다면, 앞으로 브랜드 전략가는 필요 없는 것 아닐까?"


하지만 저는 오히려 그 반대라고 생각합니다.






AI 시대, 브랜드 플랫폼을 전문가에게 의뢰해야 하는 이유는 달라질 것입니다


브랜드 플랫폼 "문서"를 작성하는 일만 놓고 본다면 AI는 앞으로도 점점 더 뛰어난 결과를 보여줄 것입니다.

하지만 브랜드의 관점은 다릅니다.


  • 우리 브랜드는 무엇을 믿는가
  • 어떤 질문을 던지는가
  • 기존 시장을 어떻게 새롭게 해석하는가


이 질문은 AI가 대신 답할 수 없습니다.


좋은 문장은 AI도 만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좋은 질문은 여전히 브랜드 전략의 영역입니다.


AI 시대에도 브랜딩 전문가가 필요한 이유는 감각적인 단어를 선택하고, 미려한 표현을 구사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Smart Strains가 '유익균의 숫자' 대신 '균주의 적합성'을 이야기했던 것처럼, Equip Foods가 건기식 시장에 'Food First'라는 새로운 기준을 제시했던 것처럼, WeNatal이 '임신 후'가 아니라 '임신 전'을 이야기하고 여성과 남성 모두의 참여를 제안했던 것처럼, 브랜드가 세상에 던져야 할 질문을 함께 정의하고 그 질문에 대한 답으로서 브랜드를 포지셔닝하기 때문입니다.


그 질문이 명확해질 때 비로소 브랜드 플랫폼은 문서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브랜드의 모든 의사결정을 이끄는 기준이 됩니다.




AI 때문에 브랜드 플랫폼의 가치가 떨어지고 전문가가 설 자리가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AI는 브랜드 플랫폼의 진짜 가치가 무엇인지 다시 질문하게 만들었습니다.

이제는 브랜드 플랫폼을 어떻게 작성할 것인가보다, 브랜드 플랫폼이 무엇을 위해 존재해야 하는지를 다시 정의해야 할 때입니다.

2026 JU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