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랜드비의 시작은 콘텐츠 플랫폼이 아니었습니다.
처음에는 국내외 브랜딩 프로젝트를 정리하고 기록하는 아카이브만 있었습니다. 저는 브랜딩 업계에서 오래 일해온 직업병적 습관으로 매일 새로운 로고와 브랜딩 사례를 찾아보고 있습니다. 이를 저만의 지식으로 쌓는 데 그치지 않고, 데이터베이스화해 누구나 활용할 수 있는 자료로 만들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하지만 막상 서비스를 공개하고 보니 방문자 수는 무척 초라했습니다. 초기 개발 시 SEO를 미처 고려하지 못한 것도 문제였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이 저처럼 브랜드에 깊은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했죠. 대부분은 검색을 통해 우연히 들어왔다가 필요한 정보만 확인한 뒤 떠났습니다.
그래서 정기적 방문을 유도하기 위해 읽을거리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브랜딩을 주제로 제가 평소 관심 있던 이슈와 트렌드를 다루는 Special Feature를 연재했고, 심도깊은 브랜딩 사례를 소개하는 뉴스레터를 발행했으며, 인스타그램을 운영하며 매주 브랜딩 소식과 채용 정보를 알리기 시작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지금도 이 모든 것을 유지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새로운 브랜딩 사례를 아카이빙하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부족한데, 매주 글을 쓰고 뉴스레터를 만들고 SNS까지 운영하는 것은 작은 조직이 감당하기에는 꽤 버거운 일입니다.
그럼에도 멈추지 않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아카이브는 Special Feature의 영감이 되고, 뉴스레터의 기반이 되며, 이 콘텐츠들은 다시 인스타그램으로 이어집니다. 각각은 독립적인 콘텐츠이지만 서로를 연결하며 브랜드비라는 하나의 경험을 만들어냅니다.
돌이켜보면 브랜드비는 정보 플랫폼과 커뮤니티를 지향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콘텐츠를 통해 미디어로 인지되고 있었습니다. (주의. 아직 정식 미디어는 아닙니다!)
그리고 이런 변화는 저희 브랜드비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최근 많은 브랜드가 제품과 서비스를 소개하는 것에서 나아가, 콘텐츠를 통해 브랜드를 경험하게 만드는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브랜드는 왜 콘텐츠를 만들기 시작했을까?
사실 브랜드가 콘텐츠를 만드는 것 자체는 새로운 일이 아닙니다.
오랫동안 기업은 신문과TV 광고를 만들었고, 홈페이지를 운영했으며, 블로그와 SNS를 통해 다양한 콘텐츠를 발행해 왔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콘텐츠는 대부분 제품과 서비스를 알리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콘텐츠의 목적이 명확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한계도 분명했습니다.
대부분의 콘텐츠는 1회성 소비를 전제로 만들어졌습니다. 신제품이 출시되면 소개 콘텐츠를 만들고, 이벤트가 열리면 홍보 콘텐츠를 만들고, 시즌이 바뀌면 새로운 캠페인을 제작했습니다. 각각의 콘텐츠는 하나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역할을 마치면 다음 콘텐츠로 대체되었습니다.
콘텐츠는 꾸준히 만들어졌지만, 축적되고 확장되기보다 반복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결국 같은 제품의 특장점과 브랜드 메시지를 조금씩 다른 형식으로 전달하는 일이 반복되었죠. 콘텐츠는 브랜드의 세계를 넓히기보다, 이미 정해진 메시지를 여러 번 주입하는 역할에 가까웠습니다.
하지만 최근에는 조금 다른 변화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제 브랜드는 제품을 설명하기 위한 콘텐츠보다, 브랜드 자체를 경험하게 하는 콘텐츠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콘텐츠는 제품 하나에 종속되지 않습니다. 새로운 글이 나오고, 새로운 영상이 공개되고, 새로운 시리즈가 이어질수록 브랜드가 가진 관점과 취향, 세계관은 점점 더 풍성해집니다.
즉, 콘텐츠는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축적되고 확장됩니다.
그래서 저는 최근의 변화를 단순히 브랜드 콘텐츠의 확대가 아니라 브랜드의 콘텐츠화라고 생각합니다.
브랜드의 콘텐츠화란 브랜드가 콘텐츠를 만드는 것에 그치지 않고, 콘텐츠를 통해 브랜드를 경험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용어 정리
- 브랜드 콘텐츠 (Brand Content) : 제품과 서비스를 설명하는 콘텐츠
- 브랜디드 콘텐츠 (Branded Content) : 브랜드를 간접적으로 경험하게 하는 콘텐츠
- 브랜드의 콘텐츠화 (Brand as Content) : 브랜드가 하나의 콘텐츠 플랫폼이 되어 관점을 지속적으로 큐레이션하는 현상
*브랜드 콘텐츠와 브랜디드 콘텐츠는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 글에서는 최근 브랜드 커뮤니케이션의 변화를 설명하기 위해 세 가지 단계로 구분해 보았습니다.
브랜드는 무엇을 콘텐츠로 만드는가?
브랜드의 콘텐츠화는 모든 브랜드가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브랜드는 전문 지식을 콘텐츠로 만들고, 어떤 브랜드는 자신들의 취향을 이야기하며, 또 어떤 브랜드는 하나의 세계관 자체를 콘텐츠로 확장합니다.
<토스의 콘텐츠화 © 토스 >
토스 : 브랜드는 지식을 콘텐츠로 만든다
토스는 금융 서비스 기업이지만, '토스피드'와 'B주류 경제학' 등을 통해 금융과 경제를 쉽고 재미있게 전달하는 콘텐츠를 꾸준히 발행하고 있습니다.
이 콘텐츠의 목적은 특정 금융상품을 판매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금융을 이해하는 방식을 제안하고, 토스가 생각하는 금융의 방향을 자연스럽게 경험하게 합니다.
사람들은 콘텐츠를 읽으면서 금융 지식을 얻고, 동시에 '토스다운 금융'이 무엇인지도 함께 이해하게 됩니다.
토스는 금융 서비스를 판매하기 전에 금융을 이해하는 경험을 제공합니다.
<Aesop의 콘텐츠화 © Aesop >
이솝(Aesop) : 브랜드는 취향을 콘텐츠로 만든다
이솝은 화장품보다 문화와 예술을 더 많이 이야기하는 브랜드로 알려져 있습니다.
에세이와 인터뷰, 시티 가이드, 라이브러리 공간 등 이솝만의 관점을 담은 큐레이션을 통해 아름다움이나 스킨케어 루틴보다 사람과 문화, 감각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갑니다.
이 콘텐츠는 제품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대신 이솝이라는 브랜드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과 취향을 보여줍니다.
이솝의 제품을 사용하지 않아도, 콘텐츠를 읽는 것만으로 이솝이라는 브랜드를 경험할 수 있는 이유입니다.
<A24의 콘텐츠화 © A24 >
A24 : 브랜드는 세계관을 콘텐츠로 만든다
A24는 영화 제작사이지만, 이제는 하나의 문화 브랜드에 가깝습니다.
영화뿐 아니라 앱, 팟캐스트, 음반, 책, 굿즈 등 다양한 형태를 통해 자신들만의 철학을 꾸준히 확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특정 영화 자체보다 'A24가 만든 작품'이라는 사실에 더 먼저 반응하기도 합니다.
A24가 만드는 것은 영화만이 아닙니다. A24라는 이름이 상징하는 감각과 철학, 그리고 세계관을 지속적으로 콘텐츠로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세 브랜드는 서로 다른 산업에 속해 있지만 공통점이 있습니다.
토스는 지식을, 이솝은 관점과 취향을, A24는 문화를 콘텐츠로 만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소비자는 그 콘텐츠를 통해 브랜드를 이해합니다.
즉, 콘텐츠는 더 이상 브랜드를 설명하는 도구가 아니라, 브랜드 자체를 경험하는 플랫폼이 된 것입니다.
결국 브랜드가 콘텐츠로 만드는 것은 제품이 아니라, 브랜드가 가진 전문성과 감성, 그리고 세계관입니다.
왜 브랜드는 콘텐츠가 되어야 하는가?
브랜드가 콘텐츠를 만드는 이유는 단순히 고객과의 접점을 늘리기 위해서만은 아닙니다.
무엇보다 브랜드를 알리는 방식 자체가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과거에는 TV 광고처럼 하나의 메시지를 많은 사람에게 동시에 전달하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모두가 같은 프로그램을 보고, 같은 광고를 보던 시대였습니다. 브랜드는 짧은 시간 안에 자신을 각인시키는 데 집중하면 되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환경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TV보다 유튜브와 OTT, SNS를 더 많이 소비합니다. 각자의 알고리즘이 추천하는 콘텐츠를 보고, 각자 다른 피드를 경험합니다.
개인화는 소비자에게는 편리한 환경이지만, 브랜드에게는 새로운 과제를 만들었습니다. 관심 있는 사람에게는 더 쉽게 도달할 수 있게 되었지만, 반대로 브랜드를 아직 모르는 새로운 사람에게는 오히려 도달하기 어려워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브랜드는 더 이상 광고만으로 성장하기 어렵습니다. 사람들이 스스로 찾아오고, 구독하고, 공유하고, 반복해서 소비할 이유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콘텐츠입니다. 좋은 콘텐츠는 광고처럼 한 번 노출되고 사라지지 않습니다. 검색으로 다시 발견되고, 뉴스레터를 통해 구독되며, SNS에서 공유되고, 다른 콘텐츠와 연결되면서 브랜드 경험을 조금씩 축적합니다.
이것이 기존 브랜드 콘텐츠와 가장 큰 차이입니다.
예전에는 콘텐츠가 제품을 설명하기 위해 존재했다면, 이제는 콘텐츠 자체가 브랜드를 기억하게 만드는 자산이 됩니다.
기존 브랜드 콘텐츠는 한 번 인지되는 것으로 끝났지만, 브랜드의 콘텐츠화를 통해서는 반복적으로 경험될 수 있습니다.
브랜드는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을까?
브랜드는 이제 제품과 서비스를 만드는 것을 넘어, 콘텐츠를 만드는 주체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흥미로운 질문이 생깁니다.
브랜드의 확장은 어디까지 가능할까요?
과거에는 브랜드의 확장을 제품군이나 서비스의 확장으로 이해했습니다. 음료 브랜드가 커피를 만들고, 패션 브랜드가 향수를 출시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콘텐츠가 브랜드의 중요한 자산이 되면서, 브랜드가 확장하는 방식도 달라지고 있습니다.
토스는 금융 서비스에서 금융 미디어로, 이솝은 스킨케어 브랜드에서 취향 큐레이터로, A24는 영화 제작사에서 하나의 문화 플랫폼으로 영역을 넓혀가고 있습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새로운 제품이나 서비스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브랜드가 가진 관점이 닿을 수 있는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브랜드의 경쟁력은 얼마나 많은 제품과 서비스를 보유하고 있는지가 아니라,
얼마나 일관된 관점으로 사람들의 시간을 점유할 수 있는지에 달려 있을지도 모릅니다.
브랜드는 콘텐츠를 통해 성장한다
콘텐츠는 더 이상 브랜드를 알리기 위한 마케팅 도구가 아닙니다. 브랜드를 경험하고, 기억하고, 관계를 이어가는 하나의 접점이 되었습니다. 물론 모든 브랜드가 뉴스레터를 발행하거나 유튜브를 운영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콘텐츠의 양이 아니라, 브랜드만의 관점을 지속적으로 축적하고 확장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것입니다.
브랜드의 콘텐츠화란 콘텐츠를 많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브랜드가 하나의 콘텐츠 플랫폼이 되어 자신만의 관점을 꾸준히 생산하고 축적하는 일입니다. 그렇기에 앞으로 브랜드의 경쟁은 제품을 얼마나 잘 설명하는가보다, 어떤 관점을 꾸준히 제시할 수 있는가로 이동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브랜드는 하나의 제품이나 서비스에서 시작합니다.
하지만 오래 기억되는 브랜드는 결국 자신만의 관점을 축적합니다.
그리고 그 관점은 콘텐츠를 통해 사람들과 만나고, 성장합니다.
그리고 흥미롭게도 이 변화는 한 방향으로만 진행되지 않습니다.
브랜드가 콘텐츠를 닮아가고 있다면, 반대로 콘텐츠도 브랜드를 닮아가고 있습니다.
다음 글에서는 '콘텐츠는 왜 브랜드가 되는가?'라는 질문을 통해, 하나의 콘텐츠가 어떻게 지속 가능한 브랜드로 확장되는지 이야기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