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디자인을 전공했지만, 디자이너는 아닙니다. 20여년 전 사수의 한 마디에 디자인은 논리적이고 분석적인 성향의 내가 갈 길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이직 아닌 이직을 했고, 지금까지 계속 네이미스트이자 브랜딩 기획자로 일해왔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디자인을 좋아하고 관심깊게 지켜보고 있고요, 또 업력이 쌓이다 보니 서당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듯이 디자인 보는 눈을 좀 키웠다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이번 글은 디자이너가 아닌 기획자로서 정리한 것이라, 관점에 따라 다른 해석이 있을 수 있음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창작의 고통과 디자인 작업의 수고로움, 그리고 의도치 않은 의사결정 과정을 너무나 잘 알기에, 디자이너에 대한 비난이나 비방이 될까봐 사실 글을 쓰는 것을 주저했었어요. 다양한 관점에서의 의견, 그리고 제가 생각하는 '좋은 로고 디자인'에 대한 이야기임을 이해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 이야기는 우연히 발견한 어느 상장사의 로고 디자인에서 출발합니다.
이 로고를 보고, 아마 대다수의 분들이 '깔끔하네' '세련되네'라고 생각하실 겁니다. 'Wow point'는 없지만,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일반적인 무난무난한 로고 디자인이예요. 그런데 저는 보자마자 불편함을 느꼈어요. 이것도 일종의 직업병인 거죠. 어떤 부분이 불편한지 간단히 얘기해 볼까 해요. 그리고 그 부분은 많은 로고 디자인에서 발견되는 요소이고, 그 한 끗 차이가 로고의 완성도를 결정하며, 프로와 아마추어를 가름짓는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1. 그리드와 황금비율
누구나 다 아는 애플의 심볼입니다. 그냥 심플하게 한 입 베어물은 사과를 그린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인데요, 들여다보면 그리드(Grid)와 황금비율이 숨겨저 있습니다.
그리드와 황금비율은 디자이너들이 매우 집착하는 요소인데요, 시각적으로 안정적이고 아름다워 보이기 위한 필수 요소이기 때문이죠. 그리드는 흔히들 격자무늬 배경에 로고를 올려놓고 '그리드에 맞췄다'라고 하는데요, 사실 들여다보면 놀랍게도 그리드가 전혀 맞지 않는 경우가 많아요! 일반인들은 잘 모르니까 시늉만 낸 것이죠. 그리드조차 못 맞추는데, 황금비율이야 뭐... (황금비율에 대한 설명은 따로 드리지 않을께요.)
또 다른 우수 사례예요. 나이키의 날렵한 심볼, 펩시콜라의 '뚱보' 심볼 역시 그리드와 황금 비율이 숨겨져 있습니다.
이제 제가 불편함을 느낀 첫번째 이유를 아시겠죠?
위쪽의 그래픽 요소에 대한 작도를 그려 보았어요. 4개의 동그라미가 사용되었는데, 사이즈도 다 다르고 중심점도 맞지 않아요.
얼핏보면 입체적인 느낌을 주었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요, 입체의 느낌은 비정형과 불규칙에서 오는 것이 아니예요. 이 부분은 다음 요소에서 자세히 알아보아요.
2. 원근법 또는 투시 (Perspective)
예시 로고 위에 시각적 연장선을 그려보았는데요, 엄청 복잡하죠? 그런데 문제는 복잡도가 아니라 이 많은 선들이 만나는 점이 다 제각각이라는 거예요.
사람은 사물을 볼 때 두 눈을 사용하고, 이를 통해 크기와 거리감을 판단해요. 로고 디자인은 대부분 평면에서 구현되기에 시각적 장치가 필요한데요, 그게 바로 원근법이예요.
명화를 보면 신기하게도 시각적 연장선이 하나 또는 두개의 점으로 모이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소실점이라고 하는데요, 소실점이 2개 이상일 경우에는 소실점의 위치가 하나의 선에 위에 있어야 원근법이 맞습니다. 오른쪽 베르메르의 음악수업을 보시면 중간의 빨간 선이 소실점의 위치예요. 소실점이 잘못된 예를 하나 들어볼께요.
예전에 많이 봤던 로고죠? 사실 저도 그 당시 별로 주의깊게 로고를 보지 않았어서 뭐가 잘못되었는지 몰랐어요. 같이 일했던 네덜란드 디자이너가 설명해줘서 알게 되었죠. (네덜란드 디자인의 특징인지, 이 분의 성향인지 모르겠는데, 로고 디자인에서 그리드와 투시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더라고요.) 3D 효과를 주려고 했지만, 투시가 맞지 않아 말 그대로 느낌만 주고 있죠. 저 같은 사람은 작도를 해봐야 알지만, 경력이 오래되고 눈이 예리한 디자이너들은 단번에 문제점을 알아차리더라고요.
원근법은 그림을 그릴 때 난이도가 꽤 높은 기술이예요. 반고흐가 원근법을 터득하기 위해 별도의 장비를 사용했다는 것을 알고 있나요?
현대 미술에서는 원근법을 무시하고 자유롭게 그리는 성향이 더 크다고 해요. 하지만 로고 디자인은 예술이 아니잖아요? 일반 대중에게 일관성 있게, 보편타당하게 아름다운 형태로 인지되려면 시각적 원칙을 따라야겠죠. 그리고 요즘은 그래픽 SW 가 좋아져서 반고흐처럼 원근 틀의 도움을 받아야 할 필요도 없어요.
3. 베이스라인 (Baseline)
사실 이 요소는 타이포그래피(Typography) 요소인데요, 타이포그래피는 들여다 보면 깊이가 엄청나고 난이도가 높아서(사실은 제가 타이포그래피 전문가가 아니어서가 맞습니다), 가장 이해하기 쉬운 '베이스라인 Baseline'만 살펴보기로 해요.
글자(Type)을 구성하는 여러가지 요소와 관련 용어가 있는데요, 베이스라인은 글자 또는 글줄의 정돈을 위해서 꼭 필요한 요소예요. 우리가 글씨 연습을 할 때 줄쳐진 공책에 맞춰서 쓰잖아요? 글자가 줄 밖으로 나갈수록 삐뚤빼뚤해 보이고 깔끔하지 못한 느낌을 주죠.
베이스라인을 그려봤어요. BK와 TOPS의 애매한 베이스라인 차이가 보이시나요? 이건 맞춘 것도 안 맞춘 것도 아니예요. 위쪽의 그래픽 요소와 BRAIN KOREA의 줄맞춤 역시 애매하죠?
하나 더 추가해볼께요. 이건 베이스라인 요소는 아니지만 비교적 이해하기 쉬워요. 다들 아시다시피 이탤릭 체는 기울여 쓴 글자인데요, 예시의 메인 로고타입은 약간 기울여져 있어요. 그런데 O자를 보시면 중심축의 각도가 다른 글자들과 맞지 않는 것을 보실 수 있어요. K의 각도와 비교해봐도 다르죠. 이 각도는 도대체 어디서 왔을까요?
위의 세 가지 요소는 로고 디자인에서 간과하기 쉽고, 또 잘 하려면 실력과 연륜이 필요한 부분이예요.
일반적으로 디자인 에이전시에서는 업력이 20~30년 된 아트디렉터가 최종 단계에서 만져주거든요. 몇 십만원 짜리 저렴한 로고 디자인에 이러한 완성도를 요구하는 것은 무리겠지만, 가끔 중견기업 내지 대기업의 로고 디자인에서 불편한 부분이 발견될 때면 아쉽기 짝이 없습니다. 저와 같은 직업병을 가진 사람이 적지는 않은 것 같아요. 2018년 화제가 됐던 구글의 G 심볼 디자인 사례를 보면요.
대부분 기업의 브랜드 담당자가 비 디자이너이기 때문에 이런 요소의 미흡함을 알아차리기 어려워요. 하지만 제대로된 디자이너라면 양심을 속여선 안되겠죠! 그리고 그리드, 원근법, 베이스라인이 제대로 된 로고 디자인을 선택하는 브랜드는, 적어도 합리적이고 원칙을 지키는 제대로 된 사람들이 만드는 브랜드라는 반증이 아닐까요? 개인적 의견입니다만, 로고 디자인의 완성도가 좋으면 기업과 제품서비스도 바르게 운영하고, 꼼꼼하게 잘 만든 경우가 많더라고요. 저는 좋은 로고 디자인을 보는 눈을 키우면 좋은 브랜드를 선별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훌륭한 브랜딩 사례들을 많이 보고, 자세히 들여다보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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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비케이탑스는 2023년 상장 폐지 절차를 밟고 있습니다.